신사임당의 그림책을 넘기다가 ‘수박과 들쥐’라는 그림이 눈을 끌었다. 들쥐 두 마리가 큼직하게 잘 익은 수박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장면이다. 줄기를 따라 커다란 수박 두 덩이가 땅바닥에 묵직하게 놓여있고, 위로 뻗은 가지에는 막 열린 꼬마 수박 하나가 매달려있다. 단내를 맡았는지 나비 두 마리가 팔랑팔랑 날아들고 한쪽엔 패랭이꽃이 꼿꼿이 피어있다.
흙냄새 물씬 풍기는 정겨움에 한참을 들여다보았는데 그러다 보니 깨달아지는 사실이 있었다. 나는 한번도 들쥐들이 수박 갉아먹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는 사실, 흙 위에 뒹구는 수박을 본 기억도 없다는 사실이다.
과일·채소가 땅에서 자라는 ‘식물’이 아니라 수퍼마켓 진열대에 놓인 ‘상품’으로 인식하고 사는 데 너무 오래 길들여졌다. 대량 유통의 편리함, 효율성, 경제성을 얻는 대신 씨 뿌리고 기른 농부의 사람냄새, 벌레·나비 날아들고 잡초 무성한 자연냄새를 잃어버렸다.
먹거리에서 사람냄새가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미국에서 20세기 초반부터였다.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져 사람의 손맛을 느끼며 먹는 음식을 기계가 대량으로 찍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쉽게 상해서 많이 만들 수도 오래 둘 수도 없는 식품을 대량생산 할 수 있게 만든 일등공신은 바로 요즘 해악이 잘 알려진 전이지방이다.
19세기 말 신시네티에는 양초공장을 하던 윌리엄 프록터란 사람과 비누공장을 하던 제임스 갬블이란 처남매부가 있었다. 이들이 동종업체들과 경쟁하기 위해 함께 세운 회사가 프록터 & 갬블이다.
양초, 비누 둘 다 돼지기름 라드와 쇠기름을 원료로 쓰는데 사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육류업체가 시장을 독점하고 있어서 재료비가 비쌌고, 때마침 전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양초사업은 앞날이 불투명했다. 뭔가 타결 책이 없을까 고심하던 이들에게 길을 열어준 사람은 카이저라는 독일 화학자였다. 목화씨 기름에 수소를 첨가하는 기법으로 인조 라드를 만들어냈다.
값싸게 무한정 제조가 가능한 인조 라드로 비누도 만들고 양초도 만들다 보니 그들은 욕심이 생겼다. 성분이 라드와 똑같다면 식품으로 팔아도 되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크리스코, 프록터 & 갬블을 돈방석위에 앉힌 쇼트닝이다.
1911년 시판되면서 쇼트닝은 미국 주방에 혁신을 일으켰다. “완전 식물성이어서 동물성 지방보다 건강에 좋고, 버터 보다 경제적”이라는 선전과 함께 집집마다 주부들이 버터나 라드 대신 쇼트닝으로 과자와 케익을 만들었다.
게다가 쇼트닝은 오래 두어도 상하지 않아 대량생산과 장거리 수송이 가능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케익, 파이, 쿠키, 도넛 등이 공장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마가린과 함께 20세기는 이들 전이지방의 시대가 되었다. 뜨거운 밥에 마가린 한 숟가락 푹 떠 넣고 간장에 비벼먹던 고소한 맛은 우리 모두에게도 추억이다.
만약 신사임당의 오죽헌 텃밭에 수박 대신 마가린 한 덩어리가 떨어져 있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들쥐들이 갉아 먹었을까? 나비들이 날아들었을까? 들쥐는 물론 벌레도 나비도 얼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가린에는 곰팡이도 슬지 않는다. 자연은 자연이 아닌 것에는 접근도 하지 않는다. 세포 속으로 들어가 세포 기능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는 ‘미친 지방’의 독성을 자연은 본능적으로 아는 모양이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부드러운 맛, 바삭바삭 고소한 맛 - 전이지방의 맛이다. 자연의 어떤 맛보다도 미각을 사로잡는 매혹적인 맛인데 그것이 함정이다. 입에서 끌리는 대로 자꾸 먹다보면 아주 천천히 소리 없이 몸과 정신을 망가트리는 못된 성분이다.
20세기는 사람의 재주가 한껏 빛나던 시대였다. 사람의 똑똑함으로는 못할 일이 없을 것처럼 인간으로서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한 세기가 지나면서 허점들이 드러나고 있다. 가장 효율적이고, 가장 지혜롭게 보였던 것들이 사실은 엄청난 위험을 안고 있었다. 수확량 늘리려고 농약, 제초제 뿌려 경작한 농작물, 병 없이 무럭무럭 자라도록 호르몬제 먹이고 항생제 먹여 기른 육축 … 그 달콤한 겉모습 뒤에 어떤 마수가 숨어있었는지 이제는 분명해졌다.
생태계에 신경 쓰고 유기농 식품을 찾는 요즘의 움직임은 21세기 식 자연으로 돌아가기이다. 삶에서 자연냄새, 사람냄새를 회복하는 것이 진짜 지혜라는 사실을 우리가 배우기 시작했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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