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미국에 온 첫 두해 동안은 내 인생에 가장 짙은 회색빛 시간이었다. 살랑대는 시원한 바람도 코끝에 스치는 청명한 공기도 그리고 맑디맑은 캘리포니아의 하늘도 나에게는 그저 모두 그리움이었다. 유독 사이가 좋은 내 동생이 보고 싶고, 내 아빠, 엄마가 늘 그리웠다. 나는 아주 단단히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었다. 나의 귀는 하루하루 지저귀는 새 소리가 아름다워도 내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했고, 나의 눈은 하늘만 올려다보면 지붕 끝에서 나오는 것만 같은 비행기에 아빠가 타고 계실 것만 같아 눈물이 흘렀다. 때로는 아이가 옆에서 손을 잡아끌어도 내 동생과 함께 마주 잡은 그 손끝이 너무도 그리웠다.
어느 날 나는 그리움을 딛고 바빠진 계기를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간을 거슬러 올라 처음 온 그 회색빛 시간에 다다랐다. 나는 그 당시 미국에서 몸만 살고 있을 뿐, 마음은 늘 한국에서 살고 있으니 언제나 나의 눈은 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 집 앞에 서 있는 아주 키가 큰 나무가 이상한 하얀 알갱이를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그 나무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희고 끈적이는 알갱이들을 마치 눈처럼 나의 작은 마당에 쏟아내었다. 마치 흩날리는 벚꽃처럼. 아침저녁 밤이 떠나가고, 찾아오는 그 공기를 느끼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마당에 앉아 있기를 좋아했는데 그 때마다 내가 먼저 해야 하던 일은 집 앞 우뚝 서 있는 키가 큰 나무가 쏟아낸 그 하얗고 끈적이는 알갱이들을 먼저 치우는 일이었다. 그리고 물청소를 하면 끝.
막 집을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리움에 눈망울이 젖으려 하는 내게 그 흰 알갱이들은 나의 그리움을 모두 쓸어가 버렸다. “아이고, 또 한 가득이네. 아이고, 내가 정말 저 나무를 베어 버리든지, 이사를 가든지 해야지” 하고 투덜대며 빗자루를 손에 잡는 순간 빗자루는 그득히 차 있던 내 눈물을 먼저 쓸어가 버렸다. 그리고 열심히 손바닥만 한 마당을 쓸고, 물청소까지 마치면 이마에 땀이 송글거리고 차가운 물로 젖은 발을 씻어 내리면 나의 하루 행사는 끝이었다. 정확히 나의 이 행사는 하루에 두 번 있었다. 오전 그리고 오후.
그러던 어느 날 나도 모르게 나에게 일을 시키는 나무를 “시아버지 나무”라고 부르고 있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시댁에 갈 때마다 나의 시아버지는 늘 분주히 일을 하시고 계셨다. 주중에도 바쁘신 분이신 데도 휴일에도 늘 쉬지 않으시고 집안일을 하셨다. 특히 나무와 화초를 사랑하셔서 휴일이면 집 안의 화분을 일층에서 이층으로, 이층에서 일층으로 밖에서 안으로 안에서 밖으로 움직이셨고, 또 어느 날은 가지치기를 하시고, 또 어느 날은 앵두가 열렸으니 따러 오라 하시고, 또 어느 날은 감이 열렸다고 보러 오라 하셨다. 쉬고 싶은 휴일에 나도 내 남편도 시아버님 덕분에 왠지 바쁘게 느껴졌다. 365일 그렇게 나무를 돌보시고, 마지막으로 겨울이 오면 집 앞 나무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시면 일년 시아버지의 나무 돌보기는 끝이 나셨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시아버지를 떠올리면 늘 바쁘신 것만 같이 느껴졌고 나도 모르게 나를 부르는 나무, 나에게 일거리를 주는 나무를 어느새 “시아버지 나무” 라고 부르고 있었다. 이제는 시아버지 나무와 이야기도 하며 나의 하루 일과에 시아버지 나무를 넣었다. “아이고~ 울 시아버지 나무께서 오늘은 조금만 떨어뜨리셨네, 감사하기도 하지”라며 웃으며 치우게 되었다.
그렇게 사이좋게 지내고 있던 어느 가을, 시아버지 나무가 내게 선물을 주었다. 아주 한 아름. 그것은 바로 나무껍질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나무껍질이 내 마당, 그리고 시아버지 나무 주변에도 한 가득이었다. 가만 주워보니 나무껍질 속이 어찌나 하얗고, 고운지 그림을 그려도 좋을 것 같아 마음대로 주워왔다. 그리고 나는 그 나무껍질에 만 3년 만에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그 시아버지 나무껍질 그림은 나에게 첫 번째 전시회 기회를 주었다. 그리고 그 기회로 다른 전시회도 하게 되었다. 시아버지 나무가 준 선물. 바로 눈물을 가져간 부지런한 즐거움이었다.
갑자기 앵두나무 아래에서 아버님이 따시는 앵두를 담을 바구니를 들고 있고 싶다. 그러고 보니 내가 미국에 와 있는 동안 아버님은 누구랑 앵두를 따셨을까?
김정연 <화가,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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