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에 와 있는 중남미 출신들간에는 묘한 갈등 기류가 흐른다. 멕시코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시골출신이 대부분인 반면 엘살바도르나 니카라과로부터 산 넘고 물 건너 미국까지 먼 길을 온 사람들은 도시출신들이 많다. 큰 나라인 멕시코 출신들이 다른 지역 출신들을 업신여길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히스패닉을 많이 고용하는 한인들 얘기를 들어보면 엘살바도르나 니카라과에서 온 종업원들은 교육도 좀 받았고 도시출신이란 자부심도 있어서인지 멕시코 출신들을 ‘촌뜨기’라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기들끼리는 서로 구별하고 우열을 가리려 하지만 우리 눈에는 그냥 다 같은 히스패닉일 뿐이다.
히스패닉은 스페인을 뜻하는 ‘히스파니아’에서 나온 어휘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스페인어를 쓴다고 해도 백인 혈통이 섞이지 않은 흑인과 인디오들은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렇게 분류할 경우 스페인어 사용자 4억5,000만 가운데 히스패닉에 해당되는 인구는 3억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을 모두 아우르는 정확한 호칭은 ‘라티노’이다. 하지만 언론조차 굳이 이런 구분을 하지 않는다. 히스패닉일 뿐이다.
미국사회 속에서 우리는 두개의 얼개를 통해 형상화된다. 하나는 스스로를 인식하는 ‘정체성’이고 또 하나는 외부에서 우리를 인식하는 ‘이미지’이다. 정체성은 물론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이름을 갖는다. 하지만 주류사회가 우리를 인식할 때는 종종 ‘아시안 아메리칸’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간혹 백인들에게 동남아 어느 국가 출신으로 오해받을 때 기분 나빠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히스패닉을 뭉뚱그리듯 그들 눈에 우리 또한 ‘아시안 아메리칸’일 뿐이다.
1941년 12월 일본이 진주만 폭격을 한지 2주 후 타임지는 ‘중국인 친구’와 ‘일본인 적’을 구분하는 방법이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는 일본인들을 상종할 수 없는 국민으로 한껏 조롱했다.
10년 후에는 중국인들이 당한다. 중국의 공산화에 따른 이른바 ‘붉은 위협’으로 미국내 중국인들은 의심과 감시의 대상이 됐다. 연방정부는 교활하게 차이나타운 곳곳에 ‘자백프로그램’ 안내문을 써붙였다. 내용인즉 간첩행위를 하는 가족이나 친구를 고발하면 합법적인 체류자격을 준다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만 1만명 이상이 밀고를 했다. 중국커뮤니티는 이로 인해 큰 상처를 받았다.
이처럼 불과 몇십년 전까지만 해도 이 땅의 아시안들은 2등시민 취급을 당하며 적대적인 분위기속에서 살아야 했다. ‘아시안 아메리칸’이란 말이 처음 등장한 것도 채 40년이 되지 않는다. 1968년 UC버클리와 샌프란시스코 스테이트 칼리지 아시안 학생들이 “아시안 관련 강좌를 개설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격렬하게 시위를 벌일 때 처음 등장한 말이다. 그전에는 ‘오리엔탈’이었다.
물론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 성공한 소수민족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과거와 같은 노골적 비하와 차별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편견의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11선의 연방하원의원으로 클린턴행정부 때 교통장관을 지냈던 일본계 2세 노먼 미네타가 들려주는 일화. 그가 GM사의 초청을 받아 이 회사 직원들에게 강연을 한 후 내려오자 GM부사장이 이렇게 말하더란 것이다. “영어를 너무 잘 하시는군요. 놀랐습니다.” 배웠다는 백인의 의식수준이 이럴진대 보통 미국인들은 말할 나위도 없다.
같은 아시안인데도 우리는 다른 커뮤니티와 구별하는데 열심이며 배타적이기까지 하다. 한인의 피가 8분의1만 섞여도 ‘자랑스런 한국계’ 운운하며 호들갑이지만 정작 다른 아시안 커뮤니티의 이슈에는 별 무관심이다. 잊어서는 안될 사실은 우리끼리 아무리 차별화하고 구별해도 아시안들은 ‘한묶음’으로 교묘한 차별과 역차별, 그리고 편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일본계 3세인 마이크 혼다 연방하원의원이 일본정부에 종군위안부 사과를 촉구하는 하원결의안을 제출하고 통과를 위해 앞장서 뛰고 있다. 3세라고 하지만 혼다의원은 엄연한 일본계이다. 일본이 섬나라여서 뿌리의식이 원래 약하다는 말로 그 의미를 깎아 내릴 일이 아니다. 좁은 뿌리의식을 넘어 서는 보편적인 가치와 대의가 있음을 혼다의원의 결의안은 말해주고 있다.
‘코리안 아메리칸’이라는 울타리만을 고집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코라시안 아메리칸’(Korasian American)으로 정체성의 영역을 좀 더 넓혀야 할 시점에 왔다고 생각한다. 변화하는 사회가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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