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씨가 LA를 방문했었다. 지난 4일 열린 LA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동행한 어머니 박미경씨는 발달장애 자녀를 둔 부모들을 위해 자녀교육 특강을 했다. 아들은 달리고 어머니는 강연을 했다.
25살의 청년과 47살의 주부인 이들 모자는 LA 공항에서부터 매스컴의 스포트라이트를 달고 다녔다. 나이로만 보면 아들은 대학 교정이나 첫 직장에 몸담으며 여자 친구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길 시기, 어머니는 다 자란 자녀들을 보며 적당히 여유롭고 적당히 허전해지는 중년의 나이이다. 출생이 평범했다면 공항에 내린다고 누구 하나 눈길 줄일 없는 모자였을 것이다.
이들의 삶이 평범치 못한 것은 자폐라는 선천성 장애 때문이었다. 세상의 모든 보통 아이들이 하듯 때 되면 앉고, 때 되면 걸으며, 때 되면 말하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지를 박씨는 뼈아프게 절감해야 했다. 자폐증 아들에게는 하나도 공짜로 되는 게 없었다.
모자는 자갈투성이 황무지에 맨손으로 길을 내듯 한뼘한뼘 삶을 개척했고, 그 생생한 피땀의 경험이 자폐아 가족들에게 희망이 되어서 영화로도 TV로도 소개되었다.
엘레노어 루즈벨트 여사는 “여성은 티백과 같아서 뜨거운 물에 넣어봐야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보통 상황에서는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힘든 상황이 닥치면 그때는 누가 강한지가 드러난다는 말이다.
박씨는 지독히도 뜨거운 물에 던져짐으로써 진가가 드러난 케이스이다. 아들이 장애아가 아니었다면 그가 다른 부모들의 희망이 되고 길잡이가 되는 영광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골프 선수 박세리씨의 아버지 박준철씨는 달변가로 유명하다. 박선수가 슬럼프에 빠져 이런저런 부정적 평가가 나오면 그가 즐겨 쓰던 표현이 있었다 -“그랜저가 고장 난다고 티코 되나?” 선수마다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급이 다르다는 말이다.
비슷한 비유를 운명철학자들도 쓴다. 사주를 믿고 안 믿고 상관없이 운명을 보는 한 시각으로 참고할 만하다. 사람의 팔자를 자동차에 비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벤츠 같은 고급 자동차를 팔자로 타고 난 사람은 남보다 쌩쌩 잘 달리며 웬만한 장애물은 힘들이지 않고 통과한다. 반면 덜덜 거리는 소형 중고차 같은 팔자를 타고 난 사람은 고생은 고생대로 하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가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타고난 자동차와 함께 사람의 운명에 중요한 것은 앞에 놓인 도로라고 한다. 도로가 포장 잘된 탄탄대로라면 소형 중고차로도 그런대로 나갈 수는 있다. 그런데 길까지 울퉁불퉁 산길이라면 삶은 고단할 수밖에 없다.
나는 어느 정도 자동차로 어느 정도의 도로를 달려왔을까 - 이제까지 삶을 되돌아보면 각자 윤곽이 나올 것이다. 벤츠 같은 성능 좋은 차에 쭉 뻗은 고속도로라면 바랄 게 없겠지만 그런 행운은 쉽지가 않다.
그런가 하면 인생에서 비포장 산길이 닥친다고 꼭 좌절할 일만도 아니다. 자동차의 성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뜨거운 물에 들어가야 티백은 제 맛을 내고, 역경이 닥쳐야 사람은 진가가 드러나는 논리이다.
다음달 부활절이면 단골로 연주되는 곡이 있다. 조지 프레데릭 헨델의 메시아이다. 헨델의 가장 유명한 곡, 메시아는 그가 가장 절망적이던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헨델은 음악가로서의 영예를 누릴 만큼 누린 인물이었다. 40여년 유럽 일대에서 하늘을 찌르는 명성과 부를 누렸다. 하지만 50대 중반이후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 반신마비가 되어 손으로 악보도 그릴 수 없게 되었고, 경제적 빈궁은 끼니를 걱정할 지경이었다.
생에 대한 분노와 혹독한 좌절감에 시달리던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찰스 제넨스라는 시인이 보낸 오라토리오 가사였다. 가사를 보는 순간 그리스도의 수난이 자신의 비참한 처지와 겹쳐지며 가슴을 찔렀다. 이후 그는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으며 미친 듯이 매달려 24일 만에 메시아를 완성했다. 생의 가장 밑바닥에서 건져낸 가장 빛나는 작품이었다.
역경은 역경만이 열 수 있는 비밀의 문을 감추고 있다. 새봄이 되었는데도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면, 전혀 새로운 길을 여는 기회일 수가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