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가. 1월과 2월이 한 해의 첫 번째 두 번째 달이 되기 훨씬 이전, 3월이 한 해의 첫 번째 달이었다는 것을. 겨울의 1월과 2월이 아니라 봄의 문턱에 들어서는 3월이 한 해의 첫 번째 달이었던 이유를.
겨울은 모든 것을 숨긴다. 겨울에 갇혀버린 것들은 모두 죽음이요 삶의 부재요 희망의 끝이다. 흰 눈으로 뒤덮인 겨울 벌판위로 찬바람만이 쌩쌩 내달리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날은 짧아지고 드디어 밤이 지배하는 때가 오면 고대인들은 꼼짝 않고 집안에 들어앉아 어서 빨리 겨울이 물러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다가 3월이 오면서 눈이 녹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3월을 흙의 달이라고 불렀다. 3월이 되면서 겨우내 눈으로 뒤덮였던 땅이 보이기 시작하고 산은 우르르 천둥소리를 냄과 동시에 서서히 녹아가는 집채만한 눈덩이를 내리 굴리며 서서히 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눈 녹은 맑은 물은 골짜기 골짜기마다 흰 포말을 일으키며 끝없이 분류(奔流)하고 물가의 나무들은 온 몸 가지가지마다 겨자씨보다도 더 작은 초록빛 씨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달.
이제야 비로소 땅이 제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나고 자라고 성장하는, 생명의 순환이 다시 시작되는 시간. 봄이 오는 이때를 그들은 땅의 달이라고 불렀다.
땅의 달이 오면 아낙들은 집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남정네들은 겨우내 넣어둔 농기구를 꺼내 손질하기 시작한다. 소를 보살피고 재거름을 부지런히 채워두기도 하면서 밭으로 나가 흙을 밟으며 땅 밑에서 올라오는 봄기운에 마음껏 기지개를 폈던 것이다. 또 봄 처녀가 오시는 날 내리는 비는 만물을 소생시키는 힘이 있다고 믿어 남녀노소 모두 밖으로 나와 온 몸으로 비를 받으며 덩실덩실 넓은 들판을 한바탕 춤마당으로 삼았다.
3월. 흙의 달이다. 밖에 나가 귀 기울여 보라. 사방천지 어느 곳에서든 3월을 여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소리는 겨울의 긴 휴면에서 깨어나는 풀잎들과 꽃들의 노래이며 남아있던 단 하나의 잎마저 날려 보내고 양팔을 들어 올려 무소유의 청빈한 자세로 하늘을 우러러 겨울 내내 침묵수행을 해온 나무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대 합창이다. 참으로 그들의 노래는 맑고 싱싱하고 신선하다. 그들의 노래와 합창이 우리의 졸린 의식을 일깨운다.
누군가가 3월을 이렇게 노래했다. “친구여, 3월이 아닌가? 창문을 열라. 햇볕이 들지 않아도 바람은 이미 녹색의 향내를 품고 있다. 응달진 어느 산골짜기에 차가운 얼음이 남아 있다 해서 누가 그것을 한탄할 것인가? 혹은 친구여! 당신의 작은 뜨락에 심어 놓은 목련이 지금껏 잠들어 있다고 너무 근심하지 말라. 손바닥을 펴 보면 햇병아리의 잔 솜털 같은 3월의 감촉이 당신의 피부에 와 닿는 것을 느낄 것이다. 동면하던 언어들이 기지개를 켜며 일어나는 저 간지러운 유혹을 당신은 뿌리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운명선처럼 손바닥에 뚜렷이 그어지는 저 봄의 촉각을 움켜잡아라.”
그렇다. 1월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스스로 솟아나 우리들 자신의 각오와 의지 속에서 희망을 불러일으키고 2월은 우리의 각오를 한 번 더 다지게 하지만 3월은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 없는 초록빛 아우성으로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 씻어준다.
3월에는 정원 혹은 들로 나가 마냥 부풀어 오르는 봄의 양성적 대기 속에 잠시나마 자신을 내어맡기는 일도 좋을 것이다. 환희하는 생명의 기쁜 율동으로 가득한 봄을 마음껏 호흡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몸과 마음속 깊숙이 봄기운이 가득 들어차고 살아있는 생명이 내부에서 힘차게 고동치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봄의 촉각을 움켜잡을 때 우리는 다시 깨어난다. 깨어나 겨울 내내 움츠려 있던 한 해의 희망과 생명에 대한 외경심 그리고 삶에 대한 뜨거운 집착과 도전을 다시 기억해 내게 된다. 이것이 3월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요, 경이요, 축복이다.
3월. 흙의 달에 우리가 한 송이 꽃이 되고 나무가 된다면, 우리 모두 꽃이 되고 나무가 되어 땅속 깊이 흐르고 있는 생명수를 힘차게 빨아올려 잎을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면, 그리하여 왜 고대인들이 3월을 한 해의 첫 달로 시작하였던가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한 해는 더더욱 가치 있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이윤홍 시인·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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