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 맑은 하늘을 가로질러 마라톤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매년 3월 첫째 일요일에 열리는 LA 마라톤 시즌이다. 자동차와 매연으로 숨 막히는 LA 도심 속 26.2마일의 거리가 1년에 한번 2만여 마라토너들로 채워진다. 그들의 뛰는 가슴과 경쾌한 몸놀림, 파란 하늘로 뿜어질 싱싱한 열기는 상상만 해도 상쾌하다.
마라톤을 앞두고 내 주위에도 여러 사람이 가슴을 설레고 있다. 대회 몇 개월 전부터 달콤한 새벽잠, 먹고 싶은 음식, 좋아하는 술 담배… 모두 희생하며 최상의 컨디션을 준비해 왔으니 설렘은 예사수준이 아닐 것이다. 이 모두가‘완주’라는 희열의 열매를 한입 베어 물기 위한 것인데, 그 맛은 “맛보지 못한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맛”이라고 마라토너들은 선지자처럼 말한다.
인간은 보통 안락함을 추구하는 존재로 인식된다. 우리가 아등바등 돈을 벌고, 자녀를 좋은 학교에 보내고 좋은 직장 갖게 하려고 애쓰는 것은 모두 안락한 삶을 보장 받으려는 의도이다. 인생에서 쓴맛, 매운맛, 뜨거운 맛은 피하고 단맛만을 즐기고 싶은 심산이다.
그런데 마라톤과 같이 사서 고생하는 일에 사람들이 심취하는 것을 보면 우리에게 ‘단맛’만이 다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음식을 봐도 우리가 달콤한 맛만 즐기는 것은 아니다. 땀을 뻘뻘 흘리고 눈물을 찔끔 거리며 먹는 맵디매운 음식은 사실 먹는 즐거움이라기보다는 고통이다.
고통스런 조건에 스스로를 내던짐으로써 우리가 얻으려는 것이 있다. 자극이다. 고통에서 쾌락을 얻는 아이러니이다.
달콤함도 안락함도 잠깐이지 어느 정도 지속되면 지루함이 되고 만다. 마라톤은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선에서 인기를 끈다는 점, 나이가 30-40대는 되어야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 시사하는 부분이다. 인생에서 지루함과 회의가 파고드는 시점이다.
울트라마라토너로 유명한 딘 카르나제스라는 사람이 있다. 울트라마라톤이란 일반 마라톤의 10배쯤 힘든 지옥의 마라톤. 지난 2004년 그가 우승한 배드워터 대회는 한여름인 7월에 캘리포니아 사막 데스밸리에서 캘리포니아 최고봉인 위트니 산정까지 135마일을 달리는 코스이다. 열기로 웬만한 사람들은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숨이 막히는 악조건이다.
샌프란시스코의 40대 사업가인 그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서른살 생일날이었다. 안락한 삶에 술 마시고 파티하며 즐길 것 다 즐겨도 삶은 허전했다. 뭔가 새로운 것, 자극이 필요하다고 느낀 순간 무작정 밖으로 뛰쳐나가 달리기 시작한 것이 울트라마라토너가 된 계기였다고 한다.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에 도전하고, 초인적 인내로 고통을 이겨내며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얻는 희열이 마라토너들을 달리게 하는 것 같다.
마라토너인 한 동료는 마라톤을 신비의 3단계 경험이라고 표현했다. 그에 의하면 달리기 시작해서 20마일이 고비이다. 20마일 정도 달리면 한발짝도 더 옮길 수 없을 만큼 극한의 고통이 밀려온다. 고통이 얼마나 극심할 수 있는지를 알게 되는 고통의 신비 단계이다.
그런데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은 그 고비를 넘기고 나면 신기하게도 통증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기쁨의 신비이다. 다음 환호성을 받으며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맛보는 것은 천국이 따로 없는 환희의 신비이다.
마라톤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보통 말한다.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꾸준하게, 너무 서두르지도 말고 너무 게으름 피지도 말며 제 속도로 가야 성공한다는 점, 포기하고 싶은 힘든 순간들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보상이 온다는 점 등이 인생역정과 비슷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마라톤과 인생은 분명히 다르다. 인생의 역경들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고행이라면 마라톤은 스스로 선택한 고행이다. 싫으면 언제든 그만 둘 수 있는 고행, 쓴맛을 자처해서 맛보는 창조적 고통의 놀이이다.
인생은 산 넘어 산이다. 한 고비를 넘겼나 싶으면 더 힘든 고비가 앞을 가로막기 일쑤이다. 마라톤처럼 결승점이 정해져 있지도 않다. 그렇기는 해도 멈출 수 없는 게 인생이라면 마라톤처럼, 스스로 선택한 놀이인양 가는 게 현명하겠다. 위의 울트라마라토너는 말한다.
“목표가 불가능하게 느껴질 때, 아기의 첫 걸음처럼 앞만 보고 계속 가세요”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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