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3김시대’와 맞물려 유행했던 말 중의 하나가 ‘대통령병’이었다. 대통령이 되지 못해 안달인 사람들의 증세를 빗댄 것이다. 영어에도 이를 지칭하는 ‘Presidential fever’라는 어휘가 있다. 대통령이 되고 싶어서 앓는 열병을 뜻한다. 그러니 ‘대통령병’이라는 말의 원조는 미국인 셈이다.
‘대통령병’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 중 하나는 제임스 가필드였다. 그는 1870년대 말 “나는 오래전부터 대통령병이 주변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해독을 끼치는지 봐 왔기 때문에 그 병에 걸리지 않기로 했다”고 일기장에 썼다. 그런 가필드조차 얼마 되지도 않아 이 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는 20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당선됐다.
한국과 미국의 대선이 다가오면서 후보들의 면면이 점차 윤곽을 드러내고 그에 따른 출마 선언도 잇따르고 있다. 대부분 후보들이 ‘조국’과 ‘국민’을 내세우며 대권도전에 나서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역시 ‘대통령병’이라는 바이러스가 현미경에 잡힌다. 결국 대권은 우국충정이 아닌 권력욕에 의해 지배되는 게임일 뿐이다.
‘대통령병’이야 대선시즌이면 한차례 휩쓸고 지나가는 계절병이라지만 이와 관련해 최근 한인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새로운 증세는 조금 걱정스럽다. 금년 초부터 한나라당 유력 후보들을 후원하겠다는 단체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나고 있다. 과거 한국 대선 때도 미주지역 한인들의 후원활동이 있어 왔지만 이번에는 이상기류라 할만큼 조기과열에 난립 양상을 보이고 있다.
유력후보인 박근혜 전 대표와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후원하는 모임만 벌써 7개를 넘어서고 있다. 이번 주말 LA에 오는 박 전 대표의 경우 대규모 강연회를 준비하고 있는 ‘박근혜 후원회’를 비롯, ‘박사모’ ‘USA 박사모’ ‘박근혜를 사랑하는 모임’등 이름도 비슷비슷한 4개이고 이 전시장은 ‘한반도 대운하 한민족 네트웍’ ‘명박 LOVE’ ‘MB 팬클럽연대’ 등 3개이다.
아무리 밸런타인의 계절이라고는 하지만 때 아닌 사랑이 너무 넘쳐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앞으로 야당내 다른 후보 지지모임이 생겨나고 몇 개월 후 윤곽을 드러낼 범여권 후보를 후원할 온갖 ‘사랑모임’까지 난무할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이다. 이쯤되면 후보 지원에 뛰어들지 못해 몸살을 앓는 ‘대선후원 열병’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 같다.
1세들의 정서가 한국과 맞물려 있는 만큼 대선에 대한 높은 관심을 탓할 수 만은 없다. 특히 인기 없는 대통령이 앉아 있으니 이번만은 꼭 정권을 교체해야 하겠다는 열망이 어느 때보다 높은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냉철하게 생각해 보자. 대선은 아직 10개월 이상이 남았고 각 당의 후보 확정도 몇 개월 후의 일이다. 더군다나 한 표를 행사할 권리가 없으니 후원이라고 해도 ‘정신적 후원’ 정도이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후보별로, 또 같은 후보 지지자들 가운데서도 세포분열 하듯이 모임이 만들어지고 있으니 이대로 가다가는 후보가 확정되더라도 후유증이 적지 않을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하다.
정말 후보를 위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같은 후보 지지자들끼리는 한 기치아래 모이는 모습을 보이는 게 바람직하다. 이에 관한 논의가 얼마나 진지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디언 추장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사심이 개입될 소지가 있음을 뜻한다. 순수한 마음은 순수한 모양새를 취해야 더욱 설득력을 지닌다.
해외 한인들에게 한국선거 투표권이 주어질 경우 나타날 부작용을 우려해 왔는데 지금 한인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상 후원열기는 이런 우려가 충분히 근거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곳은 미국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한국 대선에 갖는 관심과 후원도 좋지만 지나친 열병이 한국 대선 후 곧 있을 이곳 대선과 정치에 가져야 할 열정과 에너지까지 소진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대선 얘기가 나온 김에 16일 LA에 오는 박근혜 전 대표의 워싱턴 일정과 관련해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은 너무 힐러리 클린턴을 만나는 일에 전력투구하지 말았으면 하는 점이다. 힐러리측으로부터 확약을 못 받아 일정을 일부 비워두고 왔다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지 싶다. 성공한 여성정치인으로서의 힐러리 이미지를 차용하고픈 심정은 이해된다. 하지만 보수정객인 ‘철의 여인’ 대처를 내세우며 “한국의 대처가 되겠다”고 외쳐온 박 전 대표로서는 대북정책 등에 있어 이념적 지향점이 비슷한 공화당 유력 후보들을 만나는게 덜 정략적이고 더 자연스러워 보일 것 같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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