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피닉스, 제임스 딘, 브루스 리, 김광석의 공통점은 모두 호남(내 생각임)이며, 외로움으로 연유된 사건들로 다소 일찍 죽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안타깝고 또한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차이점은 무엇인가. 앞의 두 사람에겐 요절이란 단어가 붙고, 뒤의 두 사람에겐 안 붙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전자의 둘은 이십대요, 후자의 둘은 삼십대이기 때문인데, 남자나이 삼십대, 공자님의 표현대로라면 뜻을 세우는 ‘이립’이거늘, 뜻만 세우고 죽었는데도 요절(젊어서 일찍 죽음)이란 수식어를 못받을 만큼 젊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실정이니 서른이 넘은, 게다가 싱글 여성인 나의 경우는 멋있게 죽기에도 늦어도 한참 늦어버려, 쉽게 죽지도 못할 나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기까지 읽은 혹자께서는 “겨웠군. 새해부터 죽고싶냐?!” 라는 경각심 어린 호통을 치실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다. 외국에서 살고있는 서른이 넘은 싱글 여성에게 외로움이란 죽음보다 더 큰 무게로 온갖 생활 속에서 위협을 해오는 구체적인 공포이다. 그때가 새해라 할지라도, 홀로 떡국을 먹으면서 외로움의 공포를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외로움이 비단 이 나이, 이 계층에게만 만 존재하는 것만은 아닐진데, 유독 유난을 떨 수밖에 없는 이유를 물어온다면,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예술적, 정치적, 국민보건적인 입장 등 백가지 이유도 더 댈 수 있다.
그러기에 서른이 넘은 싱글여성으로서 외로움 때문에 죽지 않기 위해 세웠던 친구사귀기 프로젝트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
흑인 도미노(가명, 26세)를 만난 곳은 필자가 다니던 어학교의 서점에서였다. 도미노는 UC계열의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자 서점에서 일하던 타프타임 점원이었는데, 덴젤 워싱턴과 윌 스미스를 합쳐서 한손에 올리고 꽉 잡았다가 놓은 듯한 외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비싼 책을 손에 들고 지갑을 떨며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는 디스카운트를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친절하게 설명해주던 도미노, 그는 아직 미국생활에 적응이 안돼 영어가 서툰 필자에게 영어스피킹 친구가 되어주겠다는 맹랑하고 귀여운 제안을 해왔던 것이다. 자신이 대학에서 한국어수업을 듣고 있으니, 한국어를 가르쳐 준다면 금상첨화에 누이 매부 모두 만족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게다가 다정하고 친절한 매너의 덴젤 워싱턴이 마침 향수병에 시달리고 있던 가여운 싱글여성에게 “친구”라는 단어를 흘리는 순간, 오후 3시 커피와 함께 먹는 갓 구운 크리스피 도넛처럼 달콤한 따스함이 대뇌부를 스쳐가며 이렇게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Why not…”
무엇보다도, 이 낯선 땅에서 시간을 내어 대화를 할 수 있고, 그 수다를 진지하고 섬세하게 맞장구 쳐줄 사람이 남산 제1터널 같은 긴시간을 뚫고 드디어 생겼다는 기쁨에 마음이 설레기까지 했다. 아시겠지만 이곳에서 친구를 만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지만 문제는 필자의 대뇌부와 흑인 친구 도미노의 대뇌부 속에 자리잡은 친구에 대한 개념에는 상당한 견해차이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도미노는 학교 교정에서 한번 대화를 하고 난후, 곧바로 할리웃에 있는 클럽이나 아쉬운 대로 자신의 아파트에서 은밀하고 편하게 이야기를 하자며 눈빛이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게 웬 날벼락 같은 소린가!
그 제안의 날을 기점으로 도미노의 전화를 받지도, 학교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았다. 역시 남자들의 다정한 매너는 항상 소기의 목적을 갖고 있었단 말이냐 라는 피해의식적인 결론을 내어봐도, ‘친구’란 단어에 덥석 넘어가버린 필자의 경솔함에 은근히 화까지 치밀었다.
그런데 정녕 도미노는 이상한 남자였던 것일까? 아니다. 그와 나의 친구에 대한 개념 차이가 있었던 것 뿐이었다.
저마다의 관계에는 그 색깔과 의미가 있으며 각기 원하는 바도 다르다. 사람들은 자신의 외로움이나 기대치로 인해, 때때로 그 관계의 색깔과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는 일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한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상처받고 배반당한 기분이 들며, 간혹 뒤통수까지 문지르며 투덜대는 경우가 생기는 것일 게다. 자신의 기대치로 인해 현실파악이 아둔해진 상황이 만들어낸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러므로 진정, 서른이 넘은 싱글 여자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대화를 오래 유지할 수 있는 관계를 원한다면, 동성친구나 게이친구를 만나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문선희
<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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