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한 여성독자가 전화로 하소연을 했다. 40대 주부인데 그 전날 가벼운 접촉 사고를 냈다고 했다. 샤핑몰 주차장에서 차를 빼다 뒤차를 들이받은 것이었다. 차 페인트가 긁힌 정도였지만 상대방이 “엊그제 뽑은 새 차”라며 속상해 하기에 피해보상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여성은 아무 상관도 없는 나에게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하고 의아해 하는데 그가 ‘본론’을 꺼냈다.
“쿵 하고 부딪치는 순간 남편 얼굴이 눈앞을 스치더군요. 자동차가 얼마나 망가졌을까, 돈이 얼마나 들까 는 나중 문제예요. (이 일로 남편이)얼마나 죄인 심문하듯 사람을 들들 볶을까 생각하니 앞이 아득 하더군요”
그래서 피해보상도 ‘남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현금으로 했다고 한다. 평소 남편에게 비밀이라곤 없었는데 이번 사고 후 남편 얼굴만 보면 ‘속상한 것 반, 죄책감 반’이라고 그는 털어놓았다.
“남편에게 터놓고 말할 수 없는 게 너무 속상해요. 그런데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보니 집집마다 사정이 비슷해요”
자동차 운전과 관련, “한두 사람도 아니고 거의 모든 여성들이 남편에 대해 가슴에 맺힌 응어리가 있다면 남편들이 좀 변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 그의 하소연의 핵심이었다.
남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군대’이야기가 나오면 저마다 할 말이 많듯이 여성들에게는 ‘운전’이 그 비슷하다. 남편에게 운전 배우던 경험, 티켓을 받거나 사고가 났을 때 남편의 태도 등 섭섭한 사연 한둘 없는 사람이 없다.
미국생활을 시작하면서 부부가 가장 많이 부딪치는 것이 ‘운전’이다. 평소 사이가 좋던 부부라도 아내가 ‘운전 교습생’, 남편이 ‘운전 선생’이 되고나면 십중팔구 충돌이 생긴다. 남편은 운전에 관한한 지진아 같은 아내가 답답해서, 아내는 툭하면 버럭 버럭 소리를 지르는 남편을 참다못해, 부부간 싸움이 잦다보니 이혼 직전까지 간 경우들도 많다.
모든 첫 경험은 강한 흔적을 남기는 법. 뇌리에 깊게 각인된다. 운전도 예외가 아니다. 부부가 처음 운전을 가르치고 배울 때 형성된 스승-제자의 상하관계 의식이 알게 모르게 머릿속에 계속 남아있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편에게 운전 배운지 10년이 지나도 남편만 옆에 타면 운전동작이 굳어지고, 남성들은 아내가 조금만 운전 실수를 해도 과잉반응을 보이게 된다.
남성들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잠깐의 실수나 방심으로 운전만큼 큰 재산상의 손실, 생명의 위협을 가져올 만한 게 없지 않은가. 신경이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운전만큼 보편적은 아니지만 남편과 아내가 ‘사제지간’이 되는 것으로 또 골프가 있다. 운전처럼 골프도 남편이 먼저 시작하고 아내가 나중에 배우는 경우가 대부분인 데, 여성들이 ‘골프 선생’에게서 받는 설움도 만만치 않다. “그렇게 가르쳐줬는데 아직도 그 모양이냐” “‘이렇게’ 치라는 데 왜 꼭 ‘저렇게’ 치느냐”며 면박주고 짜증내는 남편의 잔소리를 듣다보면 “차라리 전문 코치에게 배우지” 싶은 마음이 절로 든다.
“아내에게 운전과 골프를 둘 다 가르친 사람은 정말 존경할 만하다”고 한 친지가 말했다. 남성인 그의 입장에서 보면 보통 인내심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성의 입장에서 보면 한인 남성 특유의 욱 - 하는 성질, 위에서 아래로 명령하는 가부장의식이 가장 여과 없이 드러나는 것이 운전 가르치고 골프 가르칠 때이다.
운전과 관련, 아내들은 남편들에게 몇가지 바라는 게 있다. 첫째, 아내의 운전 실력에 대해 객관적 시각을 가져줄 것. 몇년만에 한번 접촉사고를 낸 것을 두고 “내 그럴 줄 알았다. 조심하라고 그렇게 말해도 안 듣고…”라며 흥분하는 건 부당하다. 몇 년간의 무사고 실적을 인정해줘야 한다.
둘째, 같은 잣대를 적용할 것. 자신이 사고를 내거나 티켓을 떼면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비슷한 상황이 아내에게 닥치면 펄펄 뛰는 남성들이 많다. 셋째, 사고가 났을 때 아내의 안부를 먼저 물을 것. 사고를 당해서 남편에게 전화했더니 첫 마디가 “차 어때. 많이 망가졌어?”였다고 섭섭해 하는 여성들이 꽤 있다.
어려운 상황이 닥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일 것이다. 차사고가 난 막막한 상황에서 아내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섭섭하지 않을까. 새해에는 모든 남편들이 좀 더 푸근해진다면 고맙겠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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