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리는 올해 70세 되는 경찰 출신 백인남자다. 작년에 다이아몬드바에 있던 집을 팔고 우리 산장 부근에 짓고 있는 집이 완공될 동안 RV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고객이지만 새벽 6시부터 직원들의 출근 전 산장관리, 고객관리까지 다 해서 모두 우리 직원으로 알고 있다. 일자리를 주겠다고 하면 은퇴한 사람이라고 펄쩍 뛰고, 놀면 살찐다며 어느 곳이나 몸담아 사는 곳은 자기 집이라며 계속 일을 하는 못 말리는 사람이다.
제리의 집에서는 하나뿐인 남자가 요리를 도맡아 하고, 나는 우리 집에서 하나뿐인 여자라서 요리를 맡고 있다. 제리와 나는 서로 자기 짝들에게 요리를 가르쳐 주라고 부탁하며 “40년 넘게 밥 해 주고도 파트너 굶을까 봐 헤어지지 못하는 주제에”라며 서로 바보라고 놀린다.
나는 아침 점심을 부엌이 딸려 있는 클럽하우스 사무실에서 먹기 때문에 내가 뭘 먹는지 어떻게 조리하는지도 제리는 다 안다. 주일날 교회에 가려고 간단하게 아침을 때우면 “남편 아침밥상이 그게 뭐야. 나는 팬 케익에다 베이콘 에그를 아내에게 해 줬는데”라고 제리는 날 나무란다. 나는 홈리스(그의 셀폰에서는 ‘홈리스 제리’라는 녹음이 나온다)가 여기서 쫓겨 나가고 싶으냐고 공갈을 치고, 그는 마켓 심부름 안 해준다고 응수한다.
그 부부는 우리 산장을 다 맡겨도 될 만큼 미덥고 좋은 사람들이다. 우리가 온갖 핑계를 대며 그에게 지불하는 대가도 아깝지 않다.
RV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르면서 이 사업을 시작해서 이제 3년이 되어간다. 자연환경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사업이라 인간의 계획의 무력함을 느낄 때가 많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돕는 이들을 보내주시고, 인종과 성별 나이 구별 없이 많은 친구들을 사귀며 사람냄새가 얼마나 풋풋하며 인정이 얼마나 살가운지를 느끼게 해주는 이 사업에 매력을 느낀다. 이곳은 오는 사람 반겨 맞으며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곳이다.
물심양면 자기 희생이 따르는 사람들의 사귐이 얼마나 귀하고 뿌듯한 것인지도 알 수 있다.
오전에 웬만한 일을 정리하고 오후에 제리는 LA타임스를 나는 한국일보를 보고 때로는 같이 TV 뉴스를 보며 정치 경제 등 세계 돌아가는 얘기를 하다가 북한 얘기만 나오면 열을 올린다. 가끔 성공한 사람들 얘기가 나오면 자라처럼 목을 집어넣고 두 손 펴고 어깨춤을 추다가 “우리가 어때서. 한 남자, 한 여자랑 만 43년 살았지, 아직 남을 도울 수도 있지, RV 팍에서 일도 하지, 이만하면 됐지, 안 그래?” 하며 깔깔댄다.
성공은 자신이 인정하는 성공이어야 한다는데, 나는 어느 한 가지도 성공할 만큼 재주도 끈기도 없어서 새해를 맞이해도 스트레스를 받을 유난스런 작심을 하지 않는다. 매일 내 깜냥껏 형편대로 살아왔던 것처럼 열심히 살뿐이다.
20여년 전에는 여러 일간지에 많은 글을 발표했는데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까지도 그 글들을 남편이 써줬다고도 할 만큼 나는 침착하거나 지적으로 강인해 보이는 구석도 없다.
거기에다 공주병 왕비병(한국 문우 왈)까지 내게 있다고 하니, 집에서 하는 꼬라지도 알만하다 싶은지 우리 집에 식사초대를 해도 손님들이 기대하지 않고 음식들을 오히려 갖고 오는데 그런 배려들은 내 모자람을 채워주는 인덕이다.
아직도 숙련되지 못한 부엌일 탓에 식구들이 좀 나은 밥상을 받으려면 그릇 깨지는 소리, “아야”라는 내 비명을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내 생애에 끈질기게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결혼 후 43년(때로는 도우미가 있었지만)을 굳건히 우리 집 밥 당번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얼마 전 광풍으로 전기가 나간 적이 있다. 아무리 거창한 전송탑이나 웅장한 전기기구도 가녀린 한 가닥 전선이 끊어지니 무용지물이었다.
우리들의 생명도 그 전깃줄 같다. 건강을 유지하는 밥 짓기 그 얼마나 장한 일인가!
이 땅의 밥 짓는 자들이여, 자신의 성공된 삶을 인정하라. 그리고 밥 짓는 자들의 유세를 받아 주라. 올 한해도 정성껏 밥 잘 지어서 가족들이 건강하면 또 성공이다.
“벌써 다섯시야. 제리야, 또 밥하러 가자. 아침 9시에 일어나는 네 아내를 위해, 그리고 양상추 양배추도 모르면서도 두세 번 불러야 밥상에 앉는 내 남편을 위해서”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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