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람들이 잘 하는 것 중의 하나는 새로운 말 만들어내기이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을까!”싶게 재치 넘치는 말들을 잘도 만들어 낸다.
지난 한 해 만들어진 말들 중에는 나이 든 계층이 특히 마음에 들어 하던 말이 있었다. 미주 한인들 사이에서도 자주 오르내리던 말, 바로 ‘9988234’이다.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한 이틀 앓고 사흘째 되는 날 죽는다”는, 일정 나이 이상이면 누구나 희망사항으로 꼽는 ‘이 세상 소풍 끝내기’계획이다. 이 말은 지난 1월 민관식 전 대한체육회장의 죽음과 함께 화제로 떠올랐다는 설이 있다. 정치, 스포츠,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루 활동했던 그는 99세는 아니지만 88세까지 테니스와 수영을 즐기며 건강하게 살다가 한순간에 잠자듯 영면했다고 한다.
이렇게 복 많은 사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9988234’는 좀 염치없는 바람이라는 생각이다. 삶이란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괴로움, 단 맛과 쓴 맛, 밝은 면과 어두운 면 … 양면성을 아우르는 것인데 우리는 너무 단맛만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생성이 있으면 소멸이 있고, 젊음이 있으면 늙음이 있으며, 성장이 있으면 쇠퇴가 따라오는 우주의 자명한 섭리를 외면하고 인생의 밝은 면만 향유하겠다면 그것은 욕심이 과하다.
2006년이 해말간 얼굴로 태어나나 했더니 어느새 수명을 다했다. 시간은 쉼 없이 흘러가는데 그 날들을 2006년이다, 2007년이다 하며 인위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말들을 한다. 의미는 원래 있는 것이 아니고 부여하면 생기는 것이다. 이어지는 시간을 끊어서 불연속의 매듭들로 만드는 것은 끝, 소멸, 죽음을 보라는 의미로 나는 해석하고 싶다.
연말은 세월의 빠름, 한해의 소멸을 묵상하는 때이다. 살같이 빠른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선은 매 순간 순간의 현재를 즐겨야 하겠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태도이다. 아울러 인생이 빛과 그림자를 모두 품는 온전한 것이 되려면 하나가 더 필요하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는 일이다. 죽음을 기억하면 우리가 현재의 무엇을 어떻게 즐겨야 할지를 알게 된다.
‘17세기 네덜란드’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렘브란트이다. 당시 네덜란드는 활발한 교역활동으로 시민들의 생활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이전까지 귀족들이나 소장하던 미술품들을 일반 시민들이 사들여 거실 벽을 장식하곤 했다. 렘브란트의 다작은 수요층의 폭이 갑자기 넓어진 사회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이런 풍요의 시대에 시민들이 즐겨 벽에 걸던 그림으로 바니타스 정물화가 있었다. 바니타스(Vanitas)란 ‘덧없음’을 뜻하는 라틴어이자 16세기,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행했던 그림의 한 양식이다. 싱싱한 꽃과 탐스러운 과일 등이 있는 정물 안에 뜬금없이 해골이 놓여있는 것이 특징이다.
빛나는 생명력과 죽음의 대비 - 이 생의 모든 것들은 오래지않아 소멸해버리는 허상에 불과하니 덧없는 것들에 대한 욕심·집착을 버리라는 의미이다.‘메멘토 모리’의 메시지이다.
지금은 사라진 전통으로 유럽 사람들이 즐겨 벽에 걸던 그림 중에는 또 ‘삶의 여정도’라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장하고 성인이 되고 노인이 되며 죽음에 이르는 인생의 단계들을 계단식으로 그린 그림이다. 탄생-성장의 과정은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인생의 정점을 거쳐 노쇠-사망의 과정은 내려오는 계단으로 오름과 내림이 정확히 대칭을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인생이란 올라간 만큼 다시 내려와야 한다는 가르침이 있다.
지금은 바니타스도 ‘삶의 여정도’도 사라졌다. 발전과 성장, 젊음만 강조되는 문화 속에서 쇠퇴나 소멸은 우리의 관심권 밖으로 밀려나 있다. 노화를 최대한 뒤로 미루고 평생 젊음을 유지하다가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순간에 죽음을 맞고 싶다는 우리 모두의 바람, ‘9988234’도 이런 풍조의 반영이다.
연말은 한 해의 소멸이다. 해의 소멸을 보며 나의 소멸을 돌아보는 계기이다. 죽음을 생각하면 애 끓이며 가슴 태우던 일들도, 기를 쓰고 쟁취하고 싶었던 것들도 다 부질없다는 깨달음이 든다. 죽음을 전제로 하면 삶이 더 충실해지는 아이러니이다. ‘메멘토 모리’ 그리고 ‘카르페 디엠’ - 연말에 하는 라틴어 공부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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