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선배 한분이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그는 이번 여행을 통해 혼자 하는 여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한편으로 자유로움에는 대가가 있으며 그것이 곧 고독임을 뼈저리게 느꼈노라고 말했다. 공항에 내리는 순간부터 동쪽으로 갈지 아니면 서쪽으로 갈지를 의지대로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해방감을 안겨 주더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도 잠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행선지 이동부터 먹고 자는 소소한 문제들까지 혼자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이어지면서 적지 않은 외로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이분이 느꼈던 고독은 괴테의 그것과 닮아 있다. 괴테는 그의 기행시에서 “사람은 많은데 누구 하나 아는 사람 없는 군중 속을 헤치고 다닐 때만큼 참기 어려운 고독은 없었다”고 적고 있다.
토머스 제퍼슨은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이다. 그는 1780년대 유럽을 여행한 후 두 가지 결론을 얻었다고 밝혔다. 하나는 여행은 생각할 거리를 많이 주기 때문에 혼자 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혼자 여행을 하면 현명해지지만 동시에 불행해진다는 것이다. 현명함의 대가로 고독을 겪어야 했다는 고백이다.
흥청대는 연말이 되면 많은 이들이 고독감에 시달린다. 다른 사람들은 예외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즐거워 보이는데 자신만 그렇지 못한 것 같은 데서 고독감은 더욱 깊어진다.
그렇지만 이 계절에 기억해야 하는 것은 축제 또한 고독의 가면일 수 있다는 점이다. ‘고독’ 하면 떠오르는 단편 소설이 있다.
소설의 주인공 잭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아무 약속이 없었다. 직장동료들은 “누구 집 파티에 초대 받았다” “높은 사람과 식사를 하기로 했다”는 등 수선을 피워댔다. 잭도 그냥 있을 수만은 없어 “애인과 호화로운 파티에 초대받았다”고 둘러댔지만 정작 갈 곳이 없었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동료들을 부러워하며 잭이 찾아간 곳은 호젓한 공원. 아무도 없는 곳에서 산책을 하며 마음이나 추스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웬걸. 부어라 마셔라 하며 흥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어야 할 동료들이 자신처럼 쓸쓸한 얼굴로 그곳을 거닐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서로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으면서. 이것이 인파로 넘치고 흥청망청 돌아가는 듯한 연말의 진짜 뒷풍경일 수 있다. 당신이 부러워한 그 사람들 역시 지금 고독의 공원을 거닐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지만 남의 고독이 나에게 위로가 될 수는 없다. 진정한 위로는 고독의 가치를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고독은 존재에 대한 인식이다. 그래서 정신적인 단식과 같다. 플러스적인 사고방식에 매몰돼 있는 생활 속에서 가끔은 마이너스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고독은 바로 그런 성찰의 순간이며 한해를 갈무리하는 연말은 자연스럽게 성찰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절기이다.
법정 스님이 잠언집에서 “살아가면서 가끔은 시장기 같은 외로움을 느껴야 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바로 고독의 순기능을 말하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고독하기 때문에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자유로움이란 결국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삶의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니까.
고독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이곳은 마치 바다의 문지방 같다/주름진 치마를 펄럭이며 떠나간 여자를/기다리던 내 고독의 문턱/아무리 걸어도 닿을 수 없었던 생의 밑바닥/그곳에서 횡행하던 밀물과 썰물의 시간들/내가 안으로, 안으로만 삼키던 울음을/끝내 갈매기들이 얻어가곤 했지/모든 걸 떠나보낸 마음이 이렇게 부드럽고 견고할 수 있다니/(중략…)/그대여 사는 일이 자갈돌 같아서 자글거릴 땐/백령도 사곶 해안에 가볼 일이다/그곳엔 그대 무거운 한 생애도 결코 빠져들지 않는/견고한 고독의 해안이 펼쳐져 있나니/ 아름다운 것들은 차라리 견고한 것/(하략…)
<박정대의 ‘사곶 해안’중에서>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견고한 고독을 목침 삼아, 또 부드러운 고독을 이불 삼아 오늘 밤 잠자리에 든다면 의외로 따스함이 당신 몸을 감싸는 것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 그것이 바닷물이 빠져나간 후 모습을 드러낸 개펄 위의 반쪽 고독이 아니라 오랜 세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해안 절벽 같은 온전한 고독이라면 더 좋을 듯 싶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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