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어요”
신문사의 젊은 여자후배가 푸념을 했다. 연말은 연중 가장 모임이 많은 파티 시즌. 그만큼 즐거워야 할 텐데 반대로 그만큼 우울하다고 했다.
“친구들은 결혼해서 커플로 오는 데 나만 혼자 가려니 착잡해요. 상대적 박탈감이지요”
T.S 엘리옷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지만 나이 꽉 찬 미혼자들에게는 12월처럼 잔인한 달이 없다. 새해를 맞으면서 ‘올해는 기필코 …’‘올해는 혹시 …’하며 품었던 어떤 운명적 만남, 사랑, 그리고 결혼에의 기대를 ‘올해도 역시…’하며 내려놓는 시점이 연말이고, 혼자 삭이기도 속 쓰린 그 사실을 친구들이건 친척들이건 만나는 사람마다 “올해도 그냥 넘기느냐”며 못 박듯 확인시켜주는 때가 연말이다.
똑같이 ‘소득’없는 한해였다 해도 나이가 9로 끝나는 29살, 39살의 싱글들은 착잡하기가 몇 배는 더 심하다. 언제까지나 지속될 줄 알았던 20대, 30대가 막을 내리고 30대, 40대라는 전혀 새로운 지평으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연말이 우울하다”는 후배는 29살이다.
결혼이란 새장과 같다고 한다. 밖에 있는 새들은 들어가 보려고 애를 쓰고, 안에 들어간 새들은 빠져 나오려고 애를 쓰는 것.
결혼은 카페테리아에 비유되기도 한다. 차려져 있는 음식들 중에서 제일 좋아 보이는 것을 고르고, 값은 나중에 치르는 것. 이 사람 저사람, 이리 재고 저리 재며 제일 나아 보이는 사람을 선택하고, 그 선택에 대한 값은 살아가면서 두고두고 치르는 것이 결혼이라는 말이다.
전자는 결혼에 대한 ‘의지’의 문제, 후자는 신랑신붓감으로서의 ‘조건’과 상관이 있다. 이들 두 비유를 중심으로 보면 혼기가 꽉 찼는데도 미혼인 데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도무지 ‘새장’에 대한 호기심이 없는 새, 둘째는 줄지어 차려진 카페테리아 음식들 중 아직 ‘운명적인’누군가의 눈길을 끌지 못한 음식이다.
이유야 어떠하든 집안, 학벌, 인물, 직장 등 조건에서 빠지지 않는 1등 신랑신붓감들이 서른을 넘고, 마흔을 넘도록 혼자 사는 것이 한 풍조가 되었고, 이를 보다 못해 부모들이 발 벗고 나선 것이 1년 전이었다.
남가주의 엔젤라 박씨가 자녀결혼을 위한 부모들의 모임인 화로(FARO)를 시작한 것은 지난해 11월이었다. 30대 중반을 넘도록 미혼인 막내아들을 결혼 시키려고 혼처를 알아보다보니 “이게 우리집만의 문제가 아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동병상련의 부모들끼리 모여 서로 위로도 받고, 정보도 교환하자”며 첫 모임을 주선했는데,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미전국은 물론, 캐나다에서까지 문의가 왔고, 타지역에서 비슷한 모임을 만들고 싶다며 자문을 구하는 전화는 요즘도 오고 있다. 실제로 남가주에서는 비슷한 모임이 몇 개 생기기도 했다.
현재 화로에 등록된 회원 자녀들은 500명 정도. “만날 기회가 없어서 결혼을 못한다”는 불평은 쑥 들어가게 할 만한 숫자이다. 그런데도 결혼까지의 성사는 쉽지가 않다. 박씨가 지난 1년간 관찰한 바로는 결혼에 성공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있다. 당사자가 결혼하겠다는 의지가 있는 것은 물론 기본.
그 다음은 첫째, 부모와 자녀 간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어야 한다. 서로 대화가 안되는 부모와 자녀사이에서는 부모가 아무리 여러 후보들을 소개해도 당사자가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성사될 수가 없다. 둘째, 부모가 먼저 마음을 비워야 한다. 우리 딸· 아들이 이 정도이니 상대방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며 내거는 조건들 때문에 정작 당사자들은 만날 기회도 갖지 못하는 경우들이 허다하다.
두달전 백인 며느리를 맞은 한 주부는 이런 말을 했다.
“아들이 며느리를 처음 집에 데려온 게 7년 전이었어요. 이런 저런 조건이 마땅치 않아서 결혼 승낙을 안하고 계속 미루었지요. 그러다 이제야 결혼을 시키며 며느리를 보니 그 사이 나이가 들었더군요. 진작 결혼시켰으면 더 아름다운 신부였을 걸 하는 후회가 생기더군요”
더 나은 사위·며느릿감, 더 멋진 신랑·신붓감을 찾는 욕심을 버리면 미혼인구는 많이 줄어들 것같다. 사랑은 둘이 같이 바보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이번 연말이 미혼으로 보내는 마지막 연말이 되고 싶은가. 조금은 바보가 되는 연습을 해보자.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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