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후 20개월에 미국에 온 딸이 처음 한국을 방문한 것은 4살반쯤 되었을 때였다. 미국 온 후 첫 한국 나들이라서 잔뜩 흥분한 딸에게 나는 단단히 다짐을 해뒀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영어를 모른단다. 그러니까 꼭 한국말을 써야해”
약속대로 딸은 최대한의 성의를 다 해서 한국말로 한국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가 깜짝 놀라며 감탄을 했다.
“할머니가 어떻게 영어를 아세요?”
할머니가 ‘버스’며 ‘택시’‘카메라’같은 ‘영어’를 말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가 80년대 중반이었다. 그런데 요즘 한국에 가보면 영어권의 우리 딸보다 한국에 사는 노인들이 더 걱정스럽다. 거리 간판부터 가수 이름들, 방송 용어들, 일상적 표현들이 너무 영어 의존적이어서 그 외국어의 홍수 속에서 노인들이 어떻게 생활해내는 지 안쓰럽기까지 하다.
예를 들면 시민의 발인 서울 시내버스의 구간별 표시가 R, B, G, Y로 되어있다. 알파벳 모르는 노인들은 글자의 모양을 기억했다가 어림짐작으로 탈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R, B, G, Y가 무슨 피치 못할 전문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것도 아니다. 빨강, 파랑, 초록, 노랑의 영어 머리글자일 뿐이다.
지난해 한국에 다녀온 한 선배는 불교의 선문답 같은 표현을 배워왔다 -‘물은 셀프’. 물이 셀프라면 ‘물은 그 자체’‘물은 자아’…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로다”정도의 의미가 아닐까 하고 누군가 깊은 사색에 빠진다면 그건 코미디이다. ‘물은 셀프’는 식당에, 주로 정수기 앞에 붙어있는 문구이다. ‘셀프’는 ‘셀프서비스’의 준말. 물은 직접 가져가 마시라는 말이다.
세계화, 국제화의 시대인 현대는 국가 간 문화의 장벽이 허물어진 시대이다. 외래·선진 문물이 수시로 국경을 넘나들고 그를 지칭하는 말들이 따라 붙다보니 외국어 차용은 어느 나라에서도 불가피하다.
특히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이전에 없던 물건, 개념들이 자꾸 만들어지면서 말도 새로 만들어지고 있다. 컴퓨터, 인터넷, DVD, 캠코더, 사이버, 디지털, 아날로그 … 등은 영어 그대로 우리말로 끌어안고 쓸 뿐 다른 방도가 없다. 전 세계가 ‘컴퓨터’로 부르는 데 우리만 한국어 단어를 만든다 해도 언중(言衆)이 외면하면 말로써 생명력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엄연히 우리말이 있는데도 외국어를 마구잡이로 차용해서 쓰는 풍조이다. 한국의 소비성향이 높아지고 저마다 해외 여행을 떠나며 흥청망청하던 90년대부터였을까, 갑자기 잡지며 신문, TV에 영어 표현이 너무 많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국말과 영어의 주객이 전도된 것 같은 경우들도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여성잡지 기사.
“블랙 정장에 화려한 컬러의 아이템을 연출하면 역동적 스타일이 완성된다. 레드나 그린, 딥 블루 등 비비드한 컬러의 니트 셔츠나 머플러는 생기를 더해주며 컬러풀한 코트나 판초 등의 아우터를 걸쳐도 좋다”
‘검정’보다는 ‘블랙’이, ‘색상’ 보다는 ‘컬러’가 더 멋있어 보이는 경박한 허영심이다. 웬만한 형용사는 이제 모두 영어를 그대로 쓰는 형국이어서 스마트하고, 에로틱하며, 로맨틱하고, 쿨하고, 터프하더니 거기서 한발 더 나가 바보틱하고, 시골틱하다는 이상한 조어까지 만들어지고 있다.
지난 1990년부터 유네스코는 세계 문맹퇴치에 공이 큰 사람을 선정해 ‘세종대왕상’을 주고 있다. 유네스코가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해 붙인 상 이름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서는 우리말글이 계통 없는 외래어·외국어로 대체되는 수모를 겪고 있다.
미국에 사는 우리도 말에 관한 한 떳떳하지만은 않다. 바쁜 이민생활 중 영어, 한국어를 편한 대로 두서 없이 섞어 쓰다 보니 영어도 못하고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는 경우가 많다.
말은 민족의 혼이다. 우리말에 대한 꼿꼿한 자존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말을 할 때는 되도록 영어 없이, 바른 우리말을 쓰려는 노력이 자존심의 첫발이다. 추석, 한글날이 연휴로 이어진 뜻 깊은 주말, 우리말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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