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틀 도쿄 서비스센터에서 안나 김씨가 포즈를 취했다. 어느새 이곳에서 일 한지 20년 세월을 바라보지만 여전히 그는 청년처럼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었다.
일본 커뮤니티 서비스 센터
한인 상담원 안나 김씨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만큼 복잡 미묘한 것도 없다.
부침이 심한 역사를 가진 국가라면 대부분 이웃 국가 중 ‘천적’이 있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한들 어디 한일관계 앞에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여기엔 호불호가 뚜렷한 다혈질의 민족성도 한몫 하긴 하지만 무엇보다 한국 근·현대사의 험난한 굴곡마다 양국간에 쉽게 화해하기 힘든 악연을 거친 것이 가장 큰 연유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해방 반세기하고도 수십 년이 흘러 젊은 세대들에겐 그 자국이 옅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한국인들에게 일본은 세대를 불문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이며, 선망의 대상이며, 또 미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타향살이라고 하지만 이 해묵은 관계가 어디 가겠는가. LA에서도 리틀 도쿄는 가깝지만 먼 커뮤니티다. 그런데 바로 이 일본타운에서, 그도 유창한 일본어로 상담을 해주는 한인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것도 일본인 1세들의 가정사에서 이민문제까지 소소한 일상사를 상담하는 일이 바로 그이의 몫이다. 올해로 18년째 일본 커뮤니티 서비스센터에서 상담원으로 일해온 안나 김(75)씨. 지난달 24일 그는 이 공로를 인정받아 일미우호기금단체(USJRF)에서 주는 공로상까지 받았다. 이 특별한 일본타운의 한인 상담원을 만나봤다. 그와의 대화는 편안했지만 그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일어 수필집낸 75세 문학소녀
일흔 다섯이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곱디고운 김씨가 유창한 일본어로 전화 상담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한인인지 일본인인지 구분이 안 간다.
일제 강점기를 거쳤으니 이 연배 한인 치고 기본적인 일본어 구사쯤이야 할 수 있다손 치더라도 상담을 할 정도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유년시절을 만주에서 보냈는데 부모님이 조선학교를 보냈었는데 중등학교부터는 조선학교가 없어서 일본학교에 1년 반 정도 다녔죠. 해방이 되고서 어차피 배운 것인데 외국어로 알고 있으면 도움이 될 거 같아 잊어버리지 않게 책도 읽고 글도 쓰면서 독학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읽고, 쓰고, 말하는데 별 지장이 없을 정도가 되더군요.”
워낙 책읽기를 즐겨, 어려서부터도 닥치는 대로 일본 문학이며 수필들을 읽어 지금껏 읽은 일본 책만도 1,000권이 넘는단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일본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그는 지난 97년엔 일본어 수필집 ‘목단강’을 펴내기도 했다. 자신의 일본 이름인 ‘이에’라는 여주인공을 내세워 3인칭 시점으로 유년시절을 보낸 만주에서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는 이 수필집을 통해 당시 일제치하에서 고통받던 조선인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그려보고 싶었다고 한다.
“집필하는데 한 4년쯤 걸린 거 같아요. 당시 만주시절 이야기를 꼭 책으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당연히 직접 쓸 거라곤 엄두도 못 냈죠. 그래서 친한 일본 동화작가에게 부탁을 했는데 그런 이야기는 당사자만이 쓸 수 있다고 친구가 그러더군요. 그래서 친구의 말에 힘입어 쉬엄쉬엄 쓰다보니 책으로까지 출간됐습니다.”
<시상식에 참석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큰딸 스텔라 김, 남편 영 김 씨. 오른쪽부터는 둘째딸 키미 김씨와 손자 에디 김씨>■편견 극복하고 일본타운 터줏대감
84년 LA로 이민 와 87년부터 리틀 도쿄 서비스센터에서 일했으니 어느새 20년 세월을 바라보게 됐다.
“처음 노인 복지회에 가서 일자리를 얻고 싶다고 했더니 뭘 할 수 있느냐고 해서 일본어라 말했더니 여기로 가보라고 하더군요. 처음엔 그냥 서비스센터에서 단순 사무 업무만을 봤어요. 그러다 같이 일하던 동료의 추천으로 상담을 시작했죠. 그렇다고 처음부터 쉬웠던 건 아닙니다.
당시 상담업무보다 주변의 시선이 더 따가웠습니다. 당장 센터 소장도 일본인도 아닌데 상담을 할 수 있겠느냐부터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 보자는 암묵적인 시선까지 뭐 하나 쉬운 게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우려도 잠시. 그는 상담을 신청해온 일본인들은 물론 동료들까지 한번에 마음을 사로잡고 말았다. 문학을 통해 쌓은 일본 문화에 대한 이해와 연륜이 주는 풍부한 경험은 국경을 넘어 상담자들을 마음을 다독였고, 치밀하고 꼼꼼한 업무처리로 동료들의 마음까지도 사로잡았다.
특히 미국으로 이민 올 때 직접 신청서를 작성하고 대사관을 드나들면서 익힌 이민업무는 이민법으로 힘들어하는 일본인 1세들에게도 유용한 정보가 돼 상담전화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특히 개인 상담이나 가정문제는 민족적인 문화나 경험을 무시할 수 없는데 이런데서 오는 어려움은 없냐고 묻는 질문에 그는 고개를 흔든다.
“다양한 일본 책을 읽은 것도 많은 도움이 됐고 무엇보다 남편이 일본 지사장으로 동경에 발령 나 4년간 살았던 것도 도움이 됐습니다. 일본인들의 문화나 내면을 이해하지 못해 생기는 문제는 지금껏 없었던 것 같습니다.”
<안나 김씨가 커뮤니티 센터에서 전화로 상담을 하고 있다>
■상담으로 울고 웃고 20년
가장 보람있었던 일을 묻는 질문에 그는 주저 없이 5년 전 미국인과 결혼해 LA로 이주해온 60대 중반의 일본 여성을 꼽는다.
“감언이설로 그 여자를 꼬셔서 일본에서 일단은 데려왔는데 전혀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이었어요. 결국 일본에서 가져온 돈으로 생활을 하면서 이미 마음에도 큰 상처를 입은 상태였어요. 그러면서도 헤어지지는 못하다가 한번은 죽겠다고 며칠째 음식을 먹지 못했다며 전화를 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해선 안될 듯 싶어 잘 설득해 그 여자를 일본으로 돌려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곤 몇 달 뒤 연락이 왔어요. 지금 일본이라고. 그때 못 빠져 나왔으면 아마 자긴 죽었을 거라고.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는데 가끔 지금도 연락을 하면서 지내고 있어요.”
그러나 상담의 속성상 좋은 일보다는 나쁜 일이 더 많게 마련.
자살하는 친구를 도와야 한다며 전화를 건 이가 있었는데 911에도 연락하고 후속조치를 다 취했지만 끝끝내 전화 건 이의 친구는 자살했다고 한다. 이 역시 불과 몇 년 전 일이지만, 그래서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그이지만 며칠을 두고두고 끼니를 못 챙길 만큼 마음이 아팠다고 한다.
<지난달 24일 일미우호기금단체(USJRF) 공로상 시상식에 김씨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커뮤니티 센터 동료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한인들 편견 어린 시선 때론 상처
한인이 일본 커뮤니티 서비스센터에서 일하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물론 격려를 아끼지 않는 이들이 훨씬 더 많긴 하지만 가끔 돌발적으로 그를 적대시하는 한인들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한다.
리틀 도쿄에서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명회에 가서는 그곳에 있던 한인이 대뜸 한국 사람이 왜 일본사람을 돕느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한인들은 ‘당신이 일본말을 잘하면 얼마나 잘 하냐고’ 비아냥거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 역시 여기에 대해 처음엔 화도 나고 기가 막히기도 했지만 요즘은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린다고.
“이번에 상을 받고 나서 일본 신문과 인터뷰를 했는데 그 기자가 묻더군요. 왜 한국사람이면서 일본 커뮤니티에서 일본인들을 위해 봉사하느냐고. 그래서 말했죠. 내가 상담을 해주고, 들어주는 사람은 나에겐 일본인이 아니라 그저 상처입고 다친 한 영혼일 뿐이라고. 고통은 민족도 국가도 가리지 않죠. 그저 난 일본말로 다치고 아픈 한 인간과 이야기하고 도움을 줄뿐입니다. 여기에 한국 사람이냐 일본 사람이냐는 별로 중요한 구분이 되질 않습니다.”
남의 나라 타향살이 조차에서도 국가를 따지고, 인종을 따지고, 경계를 따지는데 익숙한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결국 사람 사는 풍경이라는 게 기쁠 땐 함께 행복해하고 아픈 데는 보듬어 안아주는 것이라는 것을 그는 묵묵히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설명>
1) 리틀 도쿄 서비스센터에서 안나 김씨가 포즈를 취했다. 어느새 이곳에서 일 한지 20년 세월을 바라보지만 여전히 그는 청년처럼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일을 즐기고 있었다.
2) 지난달 24일 일미우호기금단체(USJRF) 공로상 시상식에 김씨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한 커뮤니티 센터 동료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3) 안나 김씨가 커뮤니티 센터에서 전화로 상담을 하고 있다.
4) 시상식에 참석한 가족들과 함께 찍은 사진. 왼쪽에서 두번째가 큰딸 스텔라 김, 남편 영 김 씨. 오른쪽부터는 둘째딸 키미 김씨와 손자 에디 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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