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학이 다가오는 이때쯤이면 우리집에서는 한바탕씩 큰 소리가 나곤 했다. 긴 여름방학 동안 노는 데만 길들여진 아이들의 대뇌를 공부하는 모드로 좀 돌려주자고 시도를 하다 보면 목소리가 한 옥타브, 두 옥타브 올라가는 일이 반드시 생기곤 했다.
대개 개학 한두주 전 아이들에게 산수 문제를 내주고 “새 학년 준비를 하자”고 할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화기애애하다. 그런데 아이들이 전학년에 배운 기본까지 완전히 잊어버리고 헤매는 모습을 보다 보면 차츰 열이 솟기 시작하는 것이다. 10여년 전 아이들이 초등학생이던 때의 일이다.
요즘 엄마들에게 그때 이야기를 하면 어이없다는 듯, 구석기 시대 엄마를 구경하듯 쳐다본다. 아이들을 어떻게 그 정도로 놀게 내버려두었느냐는 질책의 시선이다. 90년대까지만 해도 “놀 때 놀고 공부할 때 공부하는 게 미국식이다”며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을 키운 것 같은데 2000년대 들어서며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한인사회로 보면 변화의 요인은 두가지이다. 첫째, 미국의 대학 입시 경쟁이 치열해져서 웬만큼 공부해서는 원하는 대학, 적어도 한인부모들이 체면 손상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대학은 들어가기가 힘들어졌다. 둘째는 ‘기러기 가족’ 등 한국학생들이 늘면서 한국의‘전투적’공부 분위기가 그대로 옮겨왔다. 한국 학생들 많은 지역에서는 방학도, 주말도 없이 그룹 과외, 특별지도가 성행해서 다른 부모들은 ‘내 아이만 뒤쳐지는 게 아닌가’불안하다고 한다.
부모는 자녀의 성취도에 얼마나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아이의 재능·실력은 타고 나는 것일까, 후천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일까.
미국사회에서도 요즘 이 이슈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미국사회라고 다르지 않아서 자녀들을 경쟁 심한 일류 유치원에 보내고 일류 사립학교를 거쳐 아이비리그에 들여보내야 직성이 풀리는 일류 병 부모들이 있다. 이들은 아이비리그 중에서도 HYP(하버드, 예일, 프린스턴)가 아니면 일류대학으로 치지도 않을 만큼 까다롭다고 한다.
한마디로 자녀교육의 ‘온실 효과’를 믿는 부모들이다. 온실에서 수분과 빛, 온도와 비료를 잘 맞춰주면 눈 내리는 겨울에도 딸기가 익듯이 아이들에게도 특별한 교육 환경을 조성해주면 영재로 키워낼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는 정성스런 원예가가 되고 아이는 탐스러운 온실 화초가 되는 관계이다.
교육열 높은 한인부모들 역시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싫다는 아이를 윽박질러가며 공부를 시키는 것은 쏟은 정성만큼 아이에게 열매가 맺히리라는 믿음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현실이 되려면 한가지 조건이 있다고 본다. 자녀가 주연, 부모는 조연으로서의 자리를 분명히 하는 것 이다.
아이들 교육에 대단히 헌신적인 어느 아버지와 통화를 한 적이 있다. 미국서 자라는 아들들에게 한자를 가르치고, 철학책을 사다주며 철학을 공부하게 하고, 에세이 쓰는 법을 가르치느라 매주 직접 영어 에세이를 써서 아이들이 읽어보게 한다고 했다. 그런 보람이 있어서 큰아들은 명문 대학에 입학했는데 문제는 둘째 아들이 었다.
“책을 사다줘도 읽지를 않고, 매주 에세이를 줘도 반응이 없어요. 큰 아이는 어휘력을 위해 사전을 외우라고 하면 기꺼이 도전을 했는데, 작은아이는 엄두를 못내요. 언제부터인가 나만 보면 피하고 말이 없어 걱정입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토끼와 거북의 경주 장면이 떠올랐다. 명문대학이라는 정상을 올라야할 아이는 거북처럼 엉금엉금 기어가고 있는데 아버지는 토끼처럼 벌써 언덕 저 높이 올라가 있는 광경이다. 앞서간 아버지는 느림보 아들이 답답해 발을 동동 구를 지경이고, 타고난 속도가 그 정도인 아들은 저 멀리 아버지를 보며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 것인가.
많은 한인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자녀는 SAT 시험준비도 안돼 있는데 부모 마음은 벌써 명문대학에 가 있다. 자녀도 힘들고 부모도 괴로운 관계이다.
새 학년이 시작되고 자녀들은 새로운 도전의 산 앞에 섰다. 정상까지 가려면 반드시 자기 속도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부모들은 잊지 말아야 하겠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