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감독은 남편의 고교시절 단짝이었다. 결혼을 하고 신랑이 메고 온 이불 보따리와 함께 작은 사이즈의 캔버스가 따라 왔기에 물어보니 “응, 신태서라구 나랑 1학년 때부터 하숙 같 이 하던 녀석인데 그림을 잘 그렸어. 졸업하자 나는 만주로 튀고 태서는 미술 공부한다고 동경으로 갔었지. 내가 그림 그리는 색시와 결혼하게 됐다니까 자기는 이제 그림 그릴 생각이 없으니까 결혼선물 살 형편도 안 되니 색시더러 덧칠해서 쓰라고 말해 달라고. 그 친구 지금 영화감독 되려고 최인규 감독 똘마니로 들어갔거든.”
젊은 여인의 상반신을 그리다만 것 같은 그 ‘6호 F’ 캔버스는 내가 덧칠해서 쓸 새도 없이 김일성이 선전포고 없이 밀고 내려오는 통에 남쪽 시민들은 혼비백산하여 몽땅 버리고 피난을 떠나야 했으니 그렇게 없어지고 말았다.
신 감독이 눈을 감았다는 소식을 라디오에서 듣고 여러 가지 일들이 머리에 어지럽게 떠올라 며칠 동안은 도무지 일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피난 다니다 내가 부산에 머물고 있을 때 전방에 있던 남편이 잠시 들렀는데 “오는 길에 태서를 찾아봤더니 지금 영화 찍을 준비를 하고 있다며 이 사진을 줬어. ‘신상옥 감독’이라고 부르기로 했대. 계집애 같이 상옥이가 뭐냐고 했더니 씩 웃더라.” 세트 장을 향해 서 있는 청년의 뒷모습이 희미하게 찍혀 있는 그 사진으로는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신상옥, 최은희 콤비의 작품 중 제일 처음 본 것이 ‘무영탑’이라는 영화였다.
대사는 별로 없고, 긴 흰옷을 입은 미인이 스크린을 흐느적흐느적 걷고 있던 기억이 난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국 영화의 기술적인 한계가 아니었을까? 다음에 본 ‘활빈당’이란 영화도 역시 대사가 별로 없었으나 화면이 보다 깨끗해지고 남장을 한 최은희의 두루마기 자락을 휘날리며 언덕 위에 서있던 수려한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는 해방이 될 때까지의 5~6년 동안 새로 이사한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영화관에서 일어자막이 붙은 서양 영화를 프로가 바뀔 때마다 놓칠세라 부지런히 보고 다녔는데 ‘모로코’ ‘창살 없는 감옥’ ‘사랑의 노래’ ‘남국의 유혹’ ‘부르그 극장’ 기타 수없이 많은 외화들을 수박 겉 핥기로 섭렵했던 탓에 얘기 줄거리나 간신히 찍어내는 당시의 한국 영화에 대해 흥미를 느낄 수 없었던 것 같다.
60년대 들어 신상옥 감독의 ‘로맨스 빠빠’를 봤을 때 비로소 편한 마음으로 공감을 느끼며 실컷 웃어대며 즐길 수 있었던 것은 내 나름대로 서양 영화에 못지 않은 영화를 한국에서 만들었구나 하는 흐뭇함에서였다.
60년대 한국 영화계는 신 감독 부부의 독무대라고 말해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와이드 스크린에 시원하게 펼쳐지는 선명하고 아름다운 색채에 압도되어 잠시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손에 땀을 쥐게 했던 ‘성춘향’, 동남아에 한국 영화의 진면목을 아낌없이 과시한 ‘빨간마후라’ 그리고 ‘연산군’ ‘내시’ ‘민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등등 쏟아내는 작품마다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한번은 대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가보니 팬들이 하도 쫓아다니니 택시를 타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 청구동까지 오게 되었노라고. 두 사람은 몹시 지쳐 있었다. 부부를 안방에 들이고 자리를 깔았다.
“인기도 좋지만 고달픈 인생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복도 쪽 미닫이가 빠끔히 열리더니 노트 두 권이 들어왔다. 나의 딸애들 짓이었다. 아우성을 피해 도망 온 집에까지 사인을 받겠다는 팬이 있을 줄이야!
80년대 말께로 기억되는데 전화벨이 울리고 수화기를 든 남편이 벌떡 일어서며 “어디 있습니까? 만날 수 있습니까? 네, 지금 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지요. 흰색 크레시터 도요타.”
전화를 놓고 멍하니 발코니 쪽을 내다보더니 “가지, 상옥이 부부가 LA에 왔대. 지금 가면 만날 수 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우리 부부만 오래. 모를 사람의 전화야” 국무부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문만 듣고 있었는데…
남편은 입을 꾹 다문 채 해안가 고급 주택지를 꼬불꼬불 운전하고 있었다.
아마 소년시절 하숙집에 보따리를 풀 때부터 하와이에서 마지막 본 신 감독에게 “너 그 마누라 버리면 죄받는다”고 소리지르던 일까지 모조리 곱씹고 있는 듯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윽고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자식, 기어코 데리고 왔구나. 그 마누라 떼 놓고는 못 살지. 동지니까”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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