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4월1일 아침 첫 시간에 강의실에 들어오신 청강선생님이 칠판에다 ‘April Fool’이라고 쓰시고 우리들을 향해 이게 무슨 뜻인지 아는 학생? 하셨지만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선생님 말씀인 즉 그날 따라 좀 늦은 듯하여 부지런히 미술과를 향해 오시는데 영문과 교수 박마리아 선생님을 만났다 한다. 가볍게 인사하고 지나치려는데 “김선생님하고 부르시더니 총장 선생님께서 김선생님을 찾으시는 것 같던데요 하시더란다.
바짝 긴장한 청강선생은 본관 총장실로 달려갔다. 김활란 박사님은 웃으시면서 “선생님도 속으셨군요. 오늘 아침 벌써 여섯분이 다녀가셨어요 하시더라고. 1년에 단 하루 거짓말을 해도 탓하지 않는다니 얼마나 통쾌한 일인가! 해방이 되고 밀려들어오는 서양문화를 이렇게 한가지씩 우리는 익혀갔다.
다음해 3월말께 기숙사 사무실에 앉아서 지난 해 생각을 하며 “금년에는 나도 한번 장난을 쳐봐야지 벼르고 있는데 마침 자수과 친구가 수틀을 겨드랑이에 끼고 현관에 들어섰다. “수틀이라! 좋은 소재라 생각했다. 나는 소등 종을 치고도 방에 올라가지 않고 사무실에 꼼짝 않고 앉은 채 ‘사랑에 목마른 청년’이 되어 수자에게 연애편지를 썼다.
“수틀을 끼고 지나가던 수자씨의 다소곳하고 아리따운 모습을 잊을 수가 없으니 한번 만나달라는 내용으로 “오는 4월1일 정오, 서대문 네거리 신촌쪽 코너에 수틀을 끼고 서있어 달라고 썼다. 나는 수틀을 끼고 길거리에 서있을 수자의 모습을 상상만 해도 너무 즐거웠다.
4월1일 수자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옳지, 서대문 네거리에 나갔구나. 재밌는 일이 벌어졌을 수도… 아니다, 상대가 없는데 무슨 일이 생겼을라구. 저걸 어째! 수틀을 들고 우왕좌왕 하는 수자의 모습이 머리에 떠오르자 “이건 진짜 웃어넘길 일이 아니구나 수자에게 죄스러워 잠시도 견딜 수 없어 행여나 하고 기숙사로 달려갔다.
그녀는 방에 누워있었다.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더니 가슴을 가리키며 웃고 있었다. “나 처음 연애편지 받아봤거든. 근데 그 자식이 나오지 않은거야하며 편지를 보라고 했다. 나는 무척 가책을 느꼈으나 어쩔 수 없이 내가 쓴 편지를 펴서 읽는 척 했다.
“나 수틀은 안 갖고 갔어. 그저 어떤 녀석인가 한번 보려고 나간 것 뿐이야 나는 속으로 “이 맹추야, 4월1일이라고 내가 강조해서 썼는데 그걸 눈치채지 못 하다니…
나는 수자에게 털어놓을 생각이었으나 처음 받은 연애편지라며 가슴앓이를 하며 누워있는 그녀에게 내가 썼다고 말해버리는 것은 더욱 가혹한 것 같아 아무 말도 못하고 말았었다.
1955년 봄 우리는 대구에 있었다. 남편의 상관이 전속되어 그분의 집을 지켜드리게 되어 집세가 없으니 청소라도 잘 해드려야지 싶어 열심히 걸레를 밀고 다녔는데 그런 내가 보기에 안 됐던지 남편이 적당히 하라며 “아주 유능한 장교가 있는데 그 부인이 대구 출신이라 여자들끼리 잘 지내보라고 했다.
사실 대구에는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던 터라 L부인은 대학을 서울에서 다녀서 무엇이든 서로 잘 통했다. 분홍저고리를 입고 며칠씩 모델을 서주기도 했다. 우리는 점점 친해져서 스스럼없이 지내게 되었는데 L부인은 성격이 소탈하고 두뇌가 명석하며 시도 잘 지었다.
어떤 날은 현관문을 들어서며 “오는 길에 시상이 떠올랐다며 한 절을 뽑으면 나는 자신도 없으면서 몇가지 낱말을 엮어 한 구절을 이어놓고는 둘이 마주보며 하, 하, 하 웃어대곤 했다. 그렇게 우리는 척척 죽이 잘 맞았다.
4월1일 아침 L부인에게 장난을 치고 싶어서 몇자 적어 운전병 편에 보냈다. 정말 안 했어야 했을 장난이었다. “어떤 여인이 사내아이를 데리고 와서 애 아버지가 아무개라고 하더라. 4월1일
한참 있다 L부인이 사색이 되어 현관에 나타났는데 “그 애 어디 있어요. 우리 남편 애 말이요 아이고, 큰일 났구나, 내가 왜 그런 거짓말을 꾸몄을까! 분명히 4월1일이라고 큼지막하게 썼는데… 나는 덮어놓고 사과부터 했다.
“용서하세요. 4월 바보 놀이한다고 꾸며 댄다는 게 지나쳤나봐. 정말 미안해요
“아이를 못 낳아본 여자에게 그런 농담은 너무 했어요 따끔하게 한마디했다. 아직도 20대인데 못 낳는다고 단정하는 것은 너무 빠른데 생각했지만 나쁜 장난을 친 죄로 아무 말도 못했다. 단단히 혼이 난 나는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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