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이 오면 어디서 언제 가셨는지 어느 땅에 묻혔는지도 모르는 나의 아버지를 많이 생각하게 된다. 늙고 손이 마르고 기운이 빠져 쓸모 없이 된 후 첩의 집에서 쫓겨나 아픈 다리를 끌고 칫솔 한 개 달랑 들고 나타났던 노후의 참담한 모습과 그런 남편을 눈물로 기도하시며 용서하고 부지런히 돌보시던 어머니의 모습. 건강이 회복되니 거기서 난 아들이 보고 싶다고 어느 날 홀연히 없어진 아버지를 어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용서를 못하셨던 것으로 안다.
아버지가 함흥 영생고보 졸업반 때 겨울방학에 귀성하여 어머니와 결혼식을 올리고 3일만에 학교로 돌아갔는데 그후 4년 동안 소식이 없었다. 함남지구 3.1만세 운동 조직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막판에 일본 헌병의 습격을 받아 구사 일생으로 도주에 성공하여 함북 ‘생기령’ 탄광의 광부가 되어 죽은 듯이 숨어 4년을 살았다 한다. 진실하고 똑똑하고 예의바르고 나무랄 데 없다던 신랑은 거친 광부생활에 엉망으로 망가져 그늘진 곳만 찾고 돈을 물쓰듯하며 여색과 도박에 빠져 내일이 없는 사람같이 자포자기하여 막가는 인생 길을 걷고 있더란다.
어머니는 그런 남편을 받들고 혼자 울며 남 보기에는 명랑하고 행복한 듯이 꾸미며 지냈다. 나는 어렸을 때 밤중에 어머니가 뜨개질을 하시며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솜씨가 좋아서 어머니가 떠준 모자나 스커트를 입고 나가면 백화점에서 샀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어떤 때 아버지가 안 들어오면 밤을 새워 스웨터 한 벌을 뜨기도 했으니까.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어머니를 울리는 나쁜 남자라는 생각만 가지고 컸다. 좋았던 일을 억지로 찾아본다면 아마 서울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주을온천’에 들려 ‘라디움 만쥬’를 사다준 일 정도일까? 그것도 어머니 추측에 의하면 기생들과 놀기 위해 온천장에 들렀을 거라고 내가 다 큰 후에 들려 주셨다.
요새 명품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아버지 얼굴을 떠올리게 된다. 그 당시 큰배에 실려 들어왔다는 뜻의 ‘하꾸라이 힝’은 주로 영·불제 고급품인데 아버지는 전신을 하꾸라이로 감고 다녔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한국 남자치고는 콧날이 서고 잘생긴 외모에 홀려 여자들이 많이 따랐다. 그리고 겨울이면 도박에 빠져 집에 들어오는 날이 별로 없었다.
한번은 설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참다못해 나더러 “아버지 모시러 갔다오라”고 하셨다. 어머니가 시키신 대로 어떤 집에 가서 문을 여니 담배 연기가 자욱한 방 한가운데에 마작 상이 있고 둘레에 몇 사람이 앉았는데 아버지 무릎에 이쁜 젊은 여자가 앉아서 같이 마작을 두고 있었다. 불시에 나타난 나를 본 아버지는 몹시 당황하여 화난 얼굴로 명령했다. “바로 들어간다고 해라!” 집에 돌아온 나는 여자 얘기는 빼고 어머니에게 본대로 보고를 했으나 아버지는 그날 밤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 늦으막해서 돌아온 아버지는 “그런 곳에 어린것을 보내어 못 볼걸 보게 했느냐!”며 어머니를 꾸짖는 것을 옆방에서 들으며 “우리 아버지는 나쁜 남자다. 엄마가 너무 불쌍하다”며 울었다.
여학교 1학년 때 우리 일가는 청진으로 이사를 했다. 큰아버지께서 집 네채를 나란히 짓고 한 대문 안에 4형제 식구들이 모여 살게 되었는데 우리 집에는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한 젊은 여자가 ‘아들을 낳아줄 자신이 있다’며 들어왔는데 아무도 말리지 않고 그 엄격하신 할아버지까지도 못 본 척 하시며 나무라지 않으시더라고, 어머니는 당신이 아들을 둘이나 낳고도 못 키운 죄로 함께 살자고 허락을 했다한다. 그리고 그 여자에게 살림을 맡겨버리고 정지방을 내주었다. 한집에 두 여자가 살림을 가지고 싸우는 격이 되니 자신이 물러서는게 도리라고 여긴다지만 우리들은 끼니때 밥이나 얻어먹는 손님 같은 존재가 돼버렸다.
언니는 동경유학을 떠나고 나는 매일이 지겨웠다. 어른들이 다 밉고 울기만 하는 어머니도 싫었다. 그 여자랑 같은 물에 들어가기 싫어서 차라리 공동탕으로 갔다. 점점 이상한 애로 변해가는 자신을 스스로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는 나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날 처음으로 ‘3.1만세 운동’이란 낱말을 들었다. 아버지는 총탄을 피해 뛰는 순간 발길을 어느 쪽으로 돌리느냐에 따라 운명이 확 달라졌다며 강용흘 박사 얘기를 했다. “강선배는 나를 끔직히 아껴줬었는데 이 길이냐 저 길이냐 찰나의 선택이 한쪽은 미국 교수이고 나는 평생 ‘도피행’일테니…” 나는 그날 이후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기로 했다. 이 나라에 난 아버지의 슬픔이 가슴에 찡하게 전해왔으므로…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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