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가을에 수양버들 열 두 가지를 화분에 꺾꽂이 해놓고 몇 달 물주며 공을 들였다. 겨울밤에 얼음이 얼 때면 뿌리도 없는 그 수양버들이 안쓰러워 아침마다 기지를 쓰다듬으며 문안을 했다. 그랬더니 생명 줄을 놓지 않고 살아서 여린 가지 마디마디에 아가의 혀 끝 같은 빨간 싹을 틔우며 따갑다고 보챈다. 나는 그 앞에서 어린 싹의 기를 받으며 시들은 나의 피부의 각질도 벗어내고 둔해진 뇌 세포도 되살린다.
이제 복숭아 살구나무 매화도 가지마다 빨갛게 물관을 감돌아 응고된 수혈이 검붉게 맺힌 꽃눈을 보면, 한하운(한센병 환자)의 시 보리피리 “필 릴니리 필 닐니리”라는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추위를 이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환희의 따가움을 느끼고 있는 계절에 점점 무감각해지는 상처가 서러워 그렇게 가슴 따가운 시를 지었을 것이다.
양봉 농장에서 일을 하는 우리 산장에 사는 윌터가 산아래 아몬드 밭에 첫 벌통을 옮기다가 벌에 쏘였다. 그는 부풀은 손등을 보여주며 올해 조심하라는 예방주사라며 쓰라림을 참고 있었다. 삶에 아픔은 때때로 더 큰 고통에 대비하는 예방주사가 되기도 하고, 열매를 맺기 위한 준비작업이기도 하다.
지난번 수퍼보울에서 MVP 상을 받은 혼혈인 하인즈 워드도 승리를 하는 순간 한국 엄마와 자신이 격은 아픈 세월의 결실로 받아들이며 감격했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자꾸 들으면 싫증 나지만 나야말로 꼭 한 마디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까지 단군의 자손 단일민족이라며 혼혈인들이 울며불며 몸부림쳐도 눈길 한번 주지 않더니 갑자기 하인즈를 한국인이라며 난리다. 나는 우리들의 지나친 편견에 항의하며 14년 전 아프리카계의 미국 병사와 결혼해 혼혈아를 낳은 한국 여인의 얘기 ‘아흔 아홉 계단’이라는 장편 소설을 쓴 적이 있고, 그 후 한흑 혼혈아 모임과 인연을 맺었고, 한때는 텍사스주 킬린(미군 병사와 결혼한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곳)까지 찾아가서 국제결혼 한국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하소연을 듣기도 했다. 그래서 ‘하얀 꽃 피는 엄마의 나라’라는 소설집도 냈다.
한흑 혼혈인들의 얘기라고 그 책들도 소외당해서 나는 그들이 가족들이나 특히 같은 민족으로부터 받은 수모가 얼마나 가혹했던 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더 관심 있게 우리 클럽하우스에서 미국인 직원들과 수퍼보울을 보며 하인즈를 주목했었다. 하인즈 워드가 승리하는 순간 너무 감격해 나는 하인즈가 한국인이라고 엄지를 내밀며 코리안 코리안을 외치고, 잘 생긴 백인 린 워드는 자기와 성이 같다며 사촌이라고 우기면서 서로 하인즈와 가깝다고 입씨름을 했다.
그 순간 한흑 혼혈아 탐이 생각났다. 탐의 아버지는 흑인이지만 한국에서 출생한 한국인이었다. 탐은 중학교 때 이민 와서 피부가 검은 미국인이라도 영어를 잘못했고, 아무리 한국말을 잘해도 한국인으로도 인정받지 못했다. 당시 탐은 영주권자로 작은 실수 때문에 형을 받고 전과자로 추방명령을 받았다. 나는 팜데일 형무소 옆에 있는 추방자 대기실까지 탐을 찾아다니며, 탐이 법적인 한국인이기보다 흑인 혈육인 미국인이라는 명분으로 이민국에 호소하려고, 한국 언론과 영사관과 몇몇 변호사도 찾아갔지만 도움 받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내 능력으로 불가항력이라는 구실로 포기를 합리화하며 탐을 잊고 지난 것이 새삼 가슴 따가웠다.
하인즈에게 명예시민권을 주며 한국인이 되어달라기보다, 먼저 모든 한국인 혼혈인들도 한국인으로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유명인에게 뜨거운 박수도 아끼지 말아야 하겠지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 혼혈인들을 격려하는 따뜻함이 있어야 건전한 사회가 이뤄 질 것이다.
하인즈의 승리가 모든 한흑 혼혈인들의 어두웠던 삶에 등대가 되었으면 한다. 내가 굳이 우리 산장의 나무들을 구별하며 대견해 하는 것은 눈바람의 추위까지 잘 견디었기 때문이다. 작은 한 그루의 나무도 살아있기 위해 온갖 따가운 아픔을 겪는다.
삶이란 순간의 기쁨을 위한 긴 아픔 같아도, 순간 순간들의 기쁨이 아픔을 잊게 한다. 기쁨도 길면 지루하고 무감각해져 그 맛을 잊게 될 것이다.
이성호 시인·RV 리조트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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