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 LA 콜러시엄에서 열린 한국 대 멕시코 축구경기가 두고두고 화제이다. 한국 국가 대표팀이 FIFA 랭킹 6위의 축구 강국, 멕시코 대표팀을 이긴 것도 신나는 일이지만, 축구장에 간 한인들에게는 그 보다 더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광경이 있었다. 끝이 안보이는 멕시칸들의 물결 - 그들의 수적 압도였다.
한국 대표팀의 멕시코 상대 평가전은 연초부터 축구 팬들을 들뜨게 했다. ‘대∼한민국’의 추억과 함께 축구 열기가 한층 뜨거워진 한인들, 남자아이들이 두 살만 되면 축구공을 가지고 논다는 축구의 민족, 멕시칸들이 모여들 테니 경기장이 초만원일 것은 일찌감치 예상이 되었었다. 실제로 한인타운에서 경기장까지 5마일 정도를 가는데 1시간 반∼두 시간이 걸릴 정도로 교통체증이 심했고, 주차 난 또한 못지 않아서 경기 중반에야 입장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도착해보니 입구부터 인산인해를 이룬 것은 멕시칸들. 멕시칸 군중은 5만여명, 한인은 1만5,000여명으로 비율로 보면 멕시칸 서너 명에 한인 한명 꼴이지만 6만여 인파 속에서 한인들은 눈을 씻고 봐야 겨우 보일 정도였다.
“멕시칸 정말 많더라”“한인은 보이지도 않고 멕시칸들만 가득한데, 좀 무섭더라”“멕시칸 속에서 우리가 마이너리티로 있자니 기분이 묘하더라”“그 사람들 기분 상하지 않게 하려고 조심조심 행동했다. 눈 마주치면 웃어주고, 악수하자면 악수하고 …”- 한인 직장에 몇명씩 고용되어 있는 멕시칸, 한인업소에서 허드렛일 하는 멕시칸에 익숙한 한인들은 축구장에서 새로운 경험을 한 것 같았다. 멕시칸의 수적 막강함을 벼락치듯 실감한 것이다.
지난해 5월 LA 시장선거에서 안토니오 비야라이고사가 승리하자 그의 셀폰은 불이 났었다. 전국 민주당 인사들의 축하 전화가 쇄도했다. 존 케리, 존 에드워즈, 하워드 딘, 알 고어 … 그리고 힐러리 클린턴까지. 미국 제2의 도시를 민주당 정치인이 차지하게 된 것도 축하할 일이지만 민주당 지도부로서 그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비야라이고사의 ‘태생’이었다. 그는 멕시칸 핏줄의 히스패닉 - 2004년 조지 부시 대통령의 재선 성공은 히스패닉 표의 40%를 얻어낸 것이 결정적이라는 분석이 나와있기 때문이다. 공화당이 잠식한 히스패닉 표를 되찾지 못하면 앞으로 백악관 되찾기는 어렵다는 위기감이 민주당 내부에 자리잡고 있다.
그 난다긴다하는 정치인들이 히스패닉 커뮤니티에 잔뜩 눈독을 들이는 데 반해, 우리 한인들은 그들의 존재를 너무 경시한 경향이 있다. 내가 돈주고 부리는 종업원, 일감 구하려고 한인타운 구석에 서있는 막 노동자쯤으로만 여긴다면 큰 오산이다. 그들 뒤에는 인구 4,000만의 히스패닉 커뮤니티가 있고, 그중 2/3는 멕시칸이다.
경기가 끝날 무렵, 1대0으로 이기고 있던 한국팀은 시간 끌기 작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멕시칸들이 소리를 쳤다 - “빨리빨리!”“빨리 해!”. 한국말 잘하고, 한인들을 속속들이 아는 멕시칸들은 우리가 의식하는 것보다 훨씬 많고, 계속 늘고 있다.
신문사의 한 동료는 그날 페인트업에 종사하는 친구와 경기를 보러 갔다. 페인트업체 사무실에서 멕시칸 직원들 20여명과 갈비며 꽁치를 구워서 저녁 먹고, 차 너덧 대에 나눠 타고 다같이 축구장으로 향했다.
“가서 보니 멕시칸과 한인들이 함께 온 그룹이 꽤 되더군요. 멕시칸과 한인들 관계는 이제 끈끈하고 깊게 얽혀있어요. 같이 벌어 같이 먹고사는 가족이지요”
한국의 언더우드 가문 4세인 원한광 박사가 ‘국제화’부르짖는 한국사회에 대해 쓴소리를 한 적이 있다. 21세기에 국제화는 분명 필요하지만 ‘우물 안 개구리’가 밖으로 나가는 데만 급급해서 ‘우리 우물’로 들어오는 ‘외국 개구리’에 소홀하다는 지적이었다.
미국사회에서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물’밖으로 나가 주류사회에 진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업원으로, 고객으로, 혹은 가정부로 ‘우리 우물’안에 들어오는 타인종을 감싸안는 일도 중요하다. ‘우리 우물’안 그들을 어떻게 대우하느냐에 따라 4,000만 히스패닉은 우리의 친구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다.
권정희 논설위원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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