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05년 3월과 4월에 연재한 10회의 “이승만 박사사 한인기독교회를 설립하기까지”의 후속으로, 하와이 섬에 동지촌이 어떻게 설립되었으며 어떻게 문을 닫았는가를 밝힌다. 신문 연재 성격상 각주는 생략하며, 이승만 박사의 존칭을 약하고 이승만이라고 한다. <편집자주>
이승만은 동지식산회사가 파산하였을 때의 심경을 1932년 12월 11일자 일기 끝머리에 “동지식산회사가 실패하였기 때문에 포기하고, 조용히 와싱톤으로 떠났다. Dongji Investment company project failed and abandoned and I went to Washington quietly.라고 적었다. 1933년 7월 26일자 일기는 츄리히에서 기록한 것으로 호놀룰루에서 온 전보에 김성기 목사가 7월 6일에 사망했고 동지식산회사 땅이 처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쓴 것이다. 이승만은 어려운 시기에 자기에게 가장 충직했던 친구 김 목사가 서거했다는 소식은 아주 충격적이고, 또 회사 처분 소식도 아주 마음 아픈 것이라고 썼다.
이승만이 동지촌을 설립한 동기를 임정의 대통령 직에서 탄핵된 다음 정치에서 실패한 자기의 면목을 새롭게 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이라고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지촌은 이승만이 사탕수수농장에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한인들을 한 곳에 모아 자작농으로 경제적 자립을 도모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만든 이상촌이었다.
이 동지촌이 실패한 것은 단순히 운영상의 미숙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부동산 사업 경력이 없었던 이승만인지라 장소 물색의 안목이 없어 비가 많은 임야를 선정하였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여의도 광장의 10배가 되는 부지를 1만 3천여 달러로 구매한 것은 어느 정도 사업의 승산이 보증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규모의 사업을 같이 운영할 인재가 그의 주위에는 없었다. 동지식산회사의 사장 신성일, 부사장 김경낙, 그리고 서기 차신호, 회계 안영찬, 감사 민찬호 등 임원들은 이름뿐이었다.
인재가 없을 때 사업을 시작한 것을 운영상의 미숙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자금조달이었다. 한인들의 경제력은 지난 여러 해 동안 이러 저런 명목의 독립기금을 바치면서 한계에 도달했다. 따라서 이들에게서 자본금 7만 달러의 반 이상의 자금조달을 기대할 수 없었다.
더구나 미국의 경제가 대공황에 들어선 관계로 기금 모집이 불가능 했음은 물론이다. 동지촌 부지를 10만 달러에 팔려고 해도 팔리지 않았다.
동지촌 역사는 6년도 안 되는 짧은 역사이지만 1925년 이후 이승만의 활동범위를 밝혀주는 좋은 자료이다.
이승만은 이 기간에 동지촌을 운영할뿐만 아니라 태평양잡지사도 운영하였다.
1924년 윤치영이 주필로 있다가 미주 본토로 떠난 후에 1930년에 김현구와 김진호가 차례로 주필로 있었고 이승만이 사장으로 있었다.
이승만은 1930년 12월 13일에 월간인 『태평양잡지』를 주간인『태평양주보』로 바꾸면서 『태평양잡지』에 꾸준히 기고하였다.
또한 그가 설립한 한인기독교회와 한인기독학원에도 관여하였고 미주 본토의 한인들과 여행을 통하여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인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이승만은 하와이 사회의 백인 인사들과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는데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숯가마와 제재소 설립을 위하여 만난 제조관련 엔지니어와 기계설비자들은 물론 하와이 정치계 인사들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하와이 하원의원이 동지식산회사 탕감을 위한 청원안을 미 국회에 제출해 줄 리가 없었다.
진주만 해군기지의 납품입찰도 단순히 신문광고에 의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승만이 숯 제조에 관한 상당한 전문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도 그의 하와이 시절을 폭넓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동지촌 부지는 현재 분할되어 개인 소유지가 되었고, 농경지 혹은 개인주택지로 바뀌어 드문드문 주택이 들어서 있다.
남아 있는 숯 가마터는 개인주택지구 네 필지에 접해 있다. 필자가 2005년 8월 19일에 그 곳을 찾아 갔을 때 아직도 숯가마는 알아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원형이 남아 있었다.
가마 속의 철물은 많이 부식되었지만 높이 약 10 피트 (건물 1 층의 높이), 가로 10 피트, 그리고 길이 30피트 정도의 숯가마 속에는 나무를 담은 대형 철제바구니가 들어갈 수 있도록 놓은 선로가 있고 숯가마 밖에는 바퀴가 달린 철제바구니가 선로위에 멈추어져 있었다.
이 숯가마 터는 Volcano Highway Route 11에서 mileage marker 16과 17번 사이에 North Oshiro 길로 우회전하여, 다리 두개를 지나면 Komo Road가 나오고, Komo Road를 따라 2 block 쯤 가서 Kaawale Boulevard로 우회전하여 Hinuhinu Street의 두 번째 필지에서 들어갈 수 있다.
이 숯 가마터로 가는 길 Komo Road 18-4076 번지에 위치한 집은 이승만 박사가 거처했다고 하는 곳인데, 현재 그 자리에 있는 건물은 1936년에 새로 지어진 것이다.
다만 이 집 마당에 이 박사가 살았을 때 심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한 그루의 소나무가 아직 자라고 있다. <끝>
이덕희
한국학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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