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백
“나도 ‘똥’ 하나 사야겠어” 어느날 친구가 느닷없이 말했다.
가운데 유난히 힘을 주어 발음한 ‘똥’은 명품 ‘루이뷔똥’을 말하는 것이다. “생전 명품이라곤 가져본 적도 없고 갖고 싶은 적도 없었는데 이제 나이가 드니까 남들처럼 좋은 백을 한두개 장만하고 싶어졌다”는 그녀의 이야기에 우리는 반색하고 환호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럼~그럼~ 우리 나이엔 백이나 구두 같은건 좋은걸 하고 다녀야 무시당하지 않지. 우리 날 잡아서 다같이 샤핑 가자!”
그렇게 잡은 날이 지난 일요일 교회 파한 후였다. 좀 심하게 마음의 작정들을 하였기 때문에 점심을 든든히 먹고 샤핑 장소 역시 특별한 곳으로 택했다. LA에서 무려 한시간 이상 떨어진 오렌지카운티의 사우스코스트 플라자(Southcoast Plaza), 세계의 명품 매장이 다 몰려있다는 대형 몰이다. 차를 타고 가며 어린아이처럼 숨길 수 없이 들뜬 얼굴이 된 친구들이 물었다.
“기분이 어때? 너무 신나지?” 그러나 나는 우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실은 조금 걱정돼”
잠시 침묵이 흐른 뒤 그들은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그렇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마. 우리가 있잖아” 나의 충동구매 성향을 너무나 잘 아는 친구들의 위로에도 불구하고 백 한개에 1,000달러를 호가하는 명품을 충동적으로 구입할 수도 있다는 사실과, 그 유혹을 순간순간 참아내야 한다는 각오는 분명 크나큰 부담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또 요즘 샤핑객들에게 자주 강림한다는 ‘지름신’이 나에게도 내리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
24년전 미국에 오자마자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이 윌셔가의 고급백화점 I 매그닌(현 윌셔 갤러리아 건물)으로 달려가 루이뷔똥 백과 지갑을 산 일이었다. 아마도 당시 내 한달 월급 정도를 썼던 것 같은데 그 이후로도 허영심에 눈이 먼 나는 돈 무서운줄 모르고 구찌, 샤넬, 디올 같은 것들을 들고, 차고, 휘감고 다녔다.
그 명품 욕심이 사라진 것은 결혼하고 아기 키우며 생활인이 된 까닭도 있지만 그동안 통산 네번 백을 잃어버린 화려한 전력 때문이다. 잃어버린 백들은 구찌 2개와 페라가모, 케이트 스페이드였고, 그 백 안에 들어있던 것들 또한 말해 뭐하랴. 지갑들도 모두 그보다 더한 명품들이었으며, 화장품으로부터 선글라스, 때론 액세서리까지 엄청난 재산을 한꺼번에 잃어버렸을 때 가슴에서 ‘철렁’ 소리가 나면서 허무했던 심정을 생각하면 또다시 명품 백을 선뜻 집어들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여하간 아주 오랜만이었다. 그날 사우스코스트 플라자에서 우리가 들어가 둘러본 매장들을 알파벳순으로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발리, 버버리, 카르티에, 셀린, 샤넬, 찰스 데이빗, 크리스천 디올, 바니스 뉴욕, 코치, 돌체 앤 가바나, DKNY, 에스카다, 펜디, 베르사체, 구찌, 헤르메스, 지미 추, 루이뷔똥, 맥스마라, 페라가모, 세인트 존, 스튜어트 와이츠먼, 타즈, 입생로랑… (몇 개 빠뜨렸을 수도 있음)
대단하지 않은가? 이렇게 많은 세계적 명품 브랜드들을 하루에 다 돌아본 일은 과거에도 없었거니와 앞으로도 결코 다시없으리라 생각한다. 이날 내 눈으로 스쳐본 물건들의 가격을 합산하면 수십만달러는 족히 되었으리라.
친구는 그 많은 곳을 돌아보고도 결국 마음으로 찜해두었던 루이뷔똥에 가서 예쁜 백을 하나 구입했다. 하지만 지갑이라도 하나 새것으로 장만하자고 다짐했던 나와 또 다른 친구는 아무 것도 사지 못했다. 내겐 앞서 말한 그런 이유도 있었지만 너무 많은 명품에 질려버렸을까? 좋은 것도 하나 두개씩 놓고 봐야 예뻐도 보이고, 비싸도 보이고, 갖고 싶기도 한 것이지, 그렇게 하염없이 명품의 바다를 허우적거리고 다니니 도무지 뭘 사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이날 나에겐 ‘확 지른다’는 지름신도 강림하지 않았고 충동구매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많은 매장을 돌아보며 발견한 공통점 하나. 고객의 대다수가 한국인을 비롯한 아시안이란 사실이었다. 어느 곳에서나 한국말이 들려왔고 한인 직원이 상주해있는 매장도 적지 않았다.
명품 하나 장만하겠다고 우리도 그렇게 뻘뻘거리고 돌아다녔으면서, 매장마다 동양인이 득실거리는 광경이 촌스럽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저 사람들과 똑같이, 나도 어쩔 수 없는 속물임을 확인했기 때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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