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습니다. 야금야금 한 주일이 지나는 것 같더니만 어영부영 한 달이 또 어찌어찌 흐르더니 드디어는 뭉텅이로 한 해가 다 가고야 말았습니다. 세월 흐르는 것이야 새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소회가 없을 수는 없지요. 그래도 어찌되었건 한해를 살아냈는걸요.
가족 중에 크게 아팠던 사람도 없고, 연로하신 시어머님 건강도 그만그만하시고, 큰돈 버는 것과는 상관없이 살았지만 부채도 없이 밥도 걱정 없이 먹을 수 있었고, 또 추워진 이 계절에 따습게 지낼 보금자리도 있는 걸요.
신산한 인생살이로 마음이 상해 찾아온 친구한테 넓지는 않지만 내 마음 한 자락도 빌려주었고, 객지 생활하는 후배하고 밥도 자주 먹었습니다. 아, 벌써부터 눈치채셨겠지만, 사람이 변변치 못해서 그런가 나는 늘 밥에 목을 매달고 사는 사람처럼 밥이 제일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내 허기도 못 참기도 하지만, 늘 내 집에 오거나 가게로 나를 찾아오는 지인들에게 밥 먹었냐고 자주 묻고는 합니다.
생각해보니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사이가 여간 좋은 게 아니더군요. 어쩌다 인사치레이거나 대접 차원에서 먹는 거 말구요. 자주 밥을 함께 먹는 사이는 괜찮은 관계인 것 같아요. 상대가 정말 싫으면, 정말 ‘밥맛없어서’ 함께 못 먹으니까요.
아, 이쯤에서 한번 나도 누군가에게 ‘밥맛없는 사람’으로 찍히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을 아는 일, 그래서 부족한 부분을 반성해 보는 일, 한마디로 주제 파악을 깊이 해보는 일이 연말인 이때쯤 꼭 필요한 일이기도 하겠으니까요.
나이가 들면서 점점 드는 생각이지만 물 흐르듯이 흐르는 삶이, 무던한 일상이 참 고마운 일이더군요. 어느 땐가는 나도 돈을 많이 벌어 큰집에서 좋은 차도 타고 누구나 다 알아보는 메이커의 옷도 입고 그렇게 살고 싶어서 안달이 났던 적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높은 고지(?)를 정해 놓고 달려 가봤던 적도 있었는데 나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달려가면 갈수록 다가오지 않는 현실이 야속하기만 하고 또 괜스레 성실한 남편만 원망하고 있더라구요. 그가 어디서 뭉칫돈 좀 벌어왔으면 좋겠는데 그는 늘 자신이 땀 흘린 만큼만 돈을 만드는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부자가 되는 꿈은 이제 접었습니다.
누구는 꿈이 있어야, 욕심을 내야, 원하는 바를 근사치까지는 얻지 않겠느냐고 조언을 하지만, 우리 부부는 그냥 오늘 먹는 밥으로 만족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 더 많이 생기면 엄청 좋아할 테지요(생각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어찌되었든 달포 전쯤 남편과 합의를 보았습니다. 과욕 없이 소박하고 행복하게 살자고 말입니다. 결혼할 때 서로 약속했던 것인데 20년이 지난 이즈음 다시 한번 확인한 셈입니다.
참, 잊을 뻔했습니다. 이건 정말 내게는 너무나 중요한 일인데요, 올해 나는 정말 그분하고 사랑에 빠졌습니다. 내 곁에서 늘 나 때문에 안타까워하시는 건 진작부터 알았지요. 그것조차 모를 만큼 둔하지는 않았는데 내가 퉁기느라(?) 알면서도 가끔씩 외면했었습니다. 나 좋은 대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지요. 그분은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또 하라고 시키시는 것도 많으니까, 사실 그 분이 쉬운 분은 아니잖아요. 미운 사람도 사랑하라 하고, 내게 엄청난 상처와 모욕을 준 그이들을 그냥 용서하라고도 하고…
사랑에 빠졌기 때문에, 나는 이제 그 분 뜻을 따라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내 잘못은 또 얼마인가요. 아무튼 오랫동안 기다려주신 그 분 손을 이제 더는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이제는 내가 그 분 손을 좀 잡아드리려구 해요.
아, 내 얘기만 너무 길어졌습니다. 아침, 저녁으로는 쌀쌀하지만 한낮의 햇볕은 참 따습지요? 시간 내서 늘 함께 해준 좋은 친구들하고 차라도 한잔 마시려구요. 아, 분위기가 무르익으면 어디 노래방에라도 갈지 모르겠습니다. 연말이니까요.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의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혹시 몰라서 남몰래 연습하고 있는 노래인데 잘 부르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두서없는 긴 편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늘 행복하고 건강하시길 빌며… 오늘은 이만, 총총.
이영화 <자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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