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할머니 한 분이 신문사를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의아해하는 사회부 기자에게 할머니는 ‘연탄은행’이란 칼럼이 실린 우리 신문 본국지와 돈 160달러를 내어놓았다. 한국에 아직도 연탄이 없어 추운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은행’에 기금을 보태고 싶다는 뜻이었다.
‘연탄은행’은 3년 전 원주에서 시작돼 전국 11개 지역에서 연탄을 나눠주는 훈훈한 은행이다. 1990년대 말 경제위기로 한국에 노숙자들이 넘쳐 났을 때 그들을 위한 무료급식을 하면서 원주 밥상공동체가 만들어졌고, 그 단체가 가난한 이웃들의 겨울나기를 돕기 위해 운영하는 사업이 ‘연탄은행’이다. 연탄을 그득하게 쌓아두고 아무 때나 누구나 필요한대로 가져갈 수가 있다고 하니 생각만 해도 푸근하다.
LA 다운타운에 사는 이 할머니는 ‘연탄은행’ 기사를 보는 순간 지리적으로 수만리, 시간적으로 20여년의 간격을 순식간에 뛰어넘은 모양이다. 그래서 연탄에 난방을 의존하던 춥고 배고프던 시절로 날아가, 연탄 떨어지면 뼛속까지 시리던 서민의 설움을 가슴으로 느꼈던 것 같다. 할머니는 노인 아파트에 벽보를 써 붙여 ‘연탄기금’을 모았다고 했다.
이따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손이 큰 할머니들을 본다. 콩나물 장사, 김밥 장사, 혹은 삯바느질로 평생 모은 재산을 장학사업이나 복지사업에 몽땅 내놓는 할머니들이다. 자신을 위해서는 동전 한 닢을 아끼며 그악스러울 정도로 절약하던 할머니들이 거액을 미련 없이 내놓는 모습은 경이롭다.
지난 8일에도 한국에서 그런 할머니 한 분의 선행이 보도되었다. 경남 창녕군 장학재단에 1억원을 기부한 정외순(70)씨이다. 이 할머니는 병약한 남편 때문에 평생 시장에서 밤이나 고구마를 구워 팔고, 공사현장에서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도맡았다. 가난한 살림에 학비를 감당할 길은 없었고 결국 5남매 중 둘만 대학에 보낸 것이 할머니에게는 늘 한이었다.
그런데 10여년 전에 사둔 땅이 마침 군 문화예술회관 건립 부지에 포함돼 보상금이 나오자 할머니는 전액을 장학재단에 기부했다. 이제 고생을 접고 그 돈으로 호강을 좀 해보고 싶다는 생각, 자녀들 대신 손자들의 교육비라도 보태줘야겠다는 생각이 할머니에게는 없었을까.
할머니는 인터뷰에서 두 가지를 이야기했다. “내가 번 돈이라고 혼자 다 쓰고 가면 죄받는다” “우수한 학생들이 돈이 없어 공부 못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
돈 많이 번 기업가로부터 어린 학생들까지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고생을 족쇄처럼 달고 산 이들 할머니의 나눔은 좀 특별한 데가 있다. 가진 것을 일부 떼어주는 나눔이 아니라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는 나눔이다. 내 몸 편한 게 오히려 불편한, 희생이 몸에 밴 사람들의 나눔 방식이다.
돌과 바람의 섬, 제주에는 설문대라는 할망(할머니)의 신화가 있다. 제주 창조신인 설문대 할망은 키가 커서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가 제주도 앞 바다의 관탈섬까지 닿았다. 한라산부터 관탈섬의 거리는 49km - 대단한 상상력이다.
할망은 거구답게 아들도 많이 낳아서 500명이나 되었다. 그런데 처참한 흉년이 든 어느해 아들들이 모두 양식을 구하러 나간 사이 할망은 아들들 먹일 죽을 끓이다가 죽솥에 빠져 죽었다. 아들들이 집에 돌아오니 어머니는 없는데 죽이 유난히 맛있어서 허겁지겁 먹었다. 하지만 막내는 뭔가 느낌이 이상해 죽을 휘저어 보니 큰 뼈다귀가 나오고, 그것이 어머니의 몸인 것을 알았다.
그 아들들이 가슴을 치며 애통해하다가 화석으로 굳어진 것이 한라산 중턱의 기암이 늘어선 오백장군이고, 산을 휘감는 바람은 자식들 걱정하는 어머니의 한숨이라는 전설이다.
자식의 허기를 보면 내 몸이라도 내어주고 싶은 것이 원초적인 모성애이다. 할머니들이란 그런 모성애로 연륜이 쌓인 존재들. 세상의 상처와 아픔, 기쁨과 슬픔을 겪어내면서 내 자식, 내 가족으로 구획 짓는 마음의 울타리를 뛰어넘는 포용력, 그것이 할머니의 사랑이 아닐까.
어린 시절 무슨 잘못을 해도 받아주던 푸근한 할머니의 추억이 우리에게는 있다.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마음부터 달려가는 사람들, 할머니들이 있어 세상은 따뜻하다. 세상에 온기를 주는 연탄 같은 존재들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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