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넘기다 이런 대목이 눈에 띄었다. “어떤 날 거리에 나가보니 거리는 방공연습을 하노라고 야단이고, 소위 민간 유지들이 경찰의 지휘로 팔에 누런 완장을 두르고 고함치며 싸대고 있었다. 몽양 여운형은 그런 일에 나서서 뺑뺑 돌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날도 누런 완장을 두르고 거리거리를 활보하고 있었다. 대체 몽양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쓰고 싶은 말도 많지마는 다 삭여버리고 말고. 방공훈련 같은 때는 좀 피해서 숨어버리는 편이 좋지 않을까. 나는 한심스러이 그의 활보하는 뒷모양을 바라보았다” ‘문단 30년의 자최’라는 표제로 잡지 ‘신천지’에 실린 김동인 작가의 글이라고 적혀있다. 해방전 얘기이다.
몽양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이 글은 확실히 혼돈을 줄 수 있다. 애국자인가? 친일파인가? 요새 피상적인 연구로 물의를 일으키는 젊은 학자들이 참고로 삼아야할 대목이다. 일정시대를 산 나에게는 국민복을 입고 팔에 노란 완장을 두르고는 바쁘게 설쳐대는 그 분의 모습이 전혀 생소하지 않다. 관이 명령하는 것은 다들 그렇게 따르는 것으로 알고 살았었다. 누가 애국자인지 골수 친일파인지 그런 피상적인 행동으로는 알 수도 없거니와 진짜 애국자일수록 돌출행동을 삼가고 잘 따르는 척 했을 수도 있다. 해방이 되고 일본이 떠날 때 몽양에게 2만원을 건네주고 갔다는 소문이 자자했는데 그 돈을 누구에게 줬는지 개인 몽양이 착복을 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2만원이면 개인에게는 큰돈이었다.
김활란 박사에 대해 큰 죄인이나 되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것을 보면 답답해진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 분의 은혜를 많이 입은 학생이었다. 38선을 넘어와서 그 분의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어떤 인생길을 걷게 되었을까? 선생님 주변을 맴돌면서 그 분의 생각, 사시는 모습을 조금은 엿볼 수 있었음으로 다른 학생들보다 선생님을 비교적 많이 안다.
1939년 조선 총독부가 미국선교사들을 추방할 때 이화전문학교의 교장은 앨리스 아펜셀러였다. 감리교 선교사 1호였던 아펜셀러 목사의 장녀로서 조선 땅에서 태어난 외국인 제1호였는데 추방을 당하게 되니 당시 부교장이었던 김활란 박사에게 학교를 맡기고 떠나면서 “코리아는 내 고향이니 꼭 돌아온다. 내가 다시 올 때까지 학생들을 잘 지켜다우” 그 당부의 말씀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오로지 학교를 살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자존심, 주의주장, 울분 따위의 감정은 완전히 잊은 사람같이… 그리고 죽기살기로 기도에 매달렸다. 하나님께 울부짖고 주님의 뜻이라는 확신이 서면 무조건 따르며 그 험한 세상을 헤쳐나간 분이다.
이화는 1886년 감리교 선교사가 학생 1명으로 시작하여 다음해에 명성황후가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하여 생겨난 학교이니 총독부에서는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었고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폐교할 방도를 찾고 있었다. 김박사의 트레이드 마크인 단발머리를 적국 미영국식이라고 당장 기르라고 명령하였고, 스커트를 입지 말고 몸뻬(일본 농촌여인들의 작업복 바지)를 입으라고까지 간섭하였다. 창씨개명 때도 불러내어 “왜 창씨를 빨리 하지 않는가? 지도자는 솔선수범해야 한다”며 다그치니까 돌아오시는 길로 고친 이름이 ‘아마기과쯔랑’(天城活蘭)이었다. 뜻인즉 “나는 너희들 나라에 속하지 않고 천성에 속한 활란이다”라고 당당히 선포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2차대전이 수렁에 빠지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의 청년들을 전쟁터에 몰고 가기에 이르러 ‘지원병’ ‘학도병’ ‘징병제도’까지 선포하면서 유력인사들을 강연회에 동원하였다. 김활란 박사의 일어구사능력은 강연을 하기에는 충분치 못했으므로 원고를 대리로 써드리는 사람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누가 썼던지 읽은 사람의 책임이겠지만) 그 원고들이 창고에서 나왔다고 떠들고 있으니 나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김박사의 서울말 어조의 일본어 강연에 감동하여 주먹을 불끈 쥐고 “대일본제국을 위해 제일선에 나가 기꺼이 죽겠노라”고 나선 조선인 청년이 있었을까,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오로지 학생들을 지키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 갖은 박해를 견디며 애쓴 보람도 없이 1943년말 ‘전시교육임시조치령’에 의해 전문학교교육이 정지되고 이화라는 교명도 못쓰게 됐다. 1945년4월 나는 전문학교 교육을 다시 시작하게된, 교명이 경성여자전문학교로 바뀐 이화 캠퍼스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는데 교장인 아마기과쯔랑 선생은 내가 오랫동안 동경하고 흠모하던 최고의 지성 김활란 박사와는 거리가 먼, 머리를 길러 뒤에다 쪽지고 좀은 어색한 일본어로 훈시를 하며 자루통바지를 입은 동네 아줌마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교문을 들어선 왼쪽 교육관과 소운동장 일대를 일본군이 차지하고 있었으니 야금야금 점령당하는 모양새가 역력하였다.
그래도 김활란 박사는 끝까지 거기서 버티다 해방을 맞는다. 누가 그분에게 돌을 던지겠는가!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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