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사 15년째, 매장 명품의류 꿰뚫어
타고난 패션감각, 상류층 단골 많아
살면서 이렇게까지 톡톡 튀는 여자를 본 적이 있나 싶다. 이렇게도 아니고, 이 정도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극단적일까 싶을만큼 그는 확실히 튄다. 그 커다란 눈에 사파이어색 아이라인을 날렵하게 그려넣고 검은 눈동자 반짝거리며 백화점 플로어를 날아다닐 때도 그렇고, 뭐가 그렇게 유쾌한지 커다란 제스처를 써가며 웃는 옆모습도 그렇고, 약간은 닭살 돋는(?) ‘허니’혹은 ‘시스터’라는 2인칭 대명사를 써가며 고객들의 샤핑을 도와줄 때도 그렇고 그는 확실히 ‘보통여자’가 아닌게 틀림없어 보인다.
퍼스널 샤퍼(personal shopper)라는 조금은 생소한 직함을 갖고 있는 이 여자. 보보 최.
그것도 세계 최고의 백화점들이 몰려 있는 베벌리힐스, 그중에서도 ‘트렌디’와 ‘고객관리’로는 세계 최강이라는 니먼 마커스에서만 15년째 잔뼈가 굵었다고 하니 어쩐지 ‘퍼스널’이라는 단어가 조금은 안쓰러워 보인다.
까다롭기로 세계 두 번 째라면 서러울게 확실한 세계 최고 부호들과 할리웃 스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커리어 우먼들과 샤핑을 매개로 ‘퍼스널’한 관계를 맺어왔으니 듣기에 따라선 고단한 그의 이력이 읽힐 법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웬걸.
“즐겁죠. 하이클래스 고객들일수록 처음 친해지는게 어려워서 그렇지 친해지고 나면 언니 같고 동생 같아지죠. 더군다나 여자들에게 샤핑이란 즐거운 놀이잖아요. 즐거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 직업인데 세상에 이만큼 행복한 일이 없지 않겠어요?”
돌아오는 대답이 의외다. 그러나 무척이나 보보답다.
니먼 마커스 내에서도 두명 밖에 없다는 퍼스널 샤퍼를 인기리에 15년째 유지하고 있는 그는 니먼 마커스의 스타중 스타다(그의 나이는 탑 시크릿. 나이를 묻는 질문에 그는 ‘어리지도 그렇다고 늙지도 않았다’고 잘라 말했다).
15년전 입사 수개월만에 탑 세일즈맨에 올랐고, 1년도 안돼 백화점 측은 그의 그런 능력에 반해 선뜻 퍼스널 샤퍼 자리를 내줬다.
니먼 마커스의 구매담당 매니저인 앨런 바버는 “몇년 전 백화점이 트렌드를 보다 더 밀착해 따라가기 위해서 다양한 신진 디자이너 옷들을 구매했고 이전 브랜드도 보다 더 세분화해 진열하기 시작했다”며 “이때 이 모든 디자이너들의 이름과 의류를 정확하게 꿰고 있는 사람은 백화점에서 단 한사람, 보보 밖에 없었다”며 그가 지금껏 백화점 측의 신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렇다고 그가 이 일에 대해 기를 쓰고 공부하고 억척으로 매달리는 것도 아니다.
그의 고객들은 타고난 그의 패션 감각 하나만을 믿고 적게는 몇천 달러에서 많게는 수만 달러에 이르는 샤핑을 맡긴다.
샤핑을 부탁하면서 그네들이 주문처럼 잊지 않는 말. “보보처럼 해줘요.”
패션이라면 세계에서도 ‘한가닥’ 한다는 고객들도 그렇게 말할 만큼 그의 패션은 확실히 튄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그의 패션은 예사롭지 않았다.
굵은 금사 니트에 알 굵은 파란 터키석 목걸이. 거기다 호피 무늬 들어간 시폰 스카프 허리띠, 검은색 수트 바지에 그는 빈티지 느낌 물씬 나는 악어가죽 반코트를 걸쳤다. 특히 시폰 스카프는 못 입게 된 블라우스를 찢어 만든 것이라고 하니 더 이상 그의 패션센스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처럼 여겨질 지경이다.
그의 이런 ‘재활용으로 다시 태어나는 빈티지 패션’은 고객들에게도 크게 어필한다.
옆선이 터진 구치 드레스를 샤핑해준 그는 그 고객의 옷장을 열어 검은 실크 블라우스를 찢어 무릎에 매줬다고 한다. 처음엔 어색해하던 그 고객은 그날 밤 파티에서 최고로 주목받는 여성이 됐고 그때부터 그의 열혈 고객이 돼버렸다.
그뿐 아니다.
올해로 60세가 된 여성고객(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평범하기 그지없었던)에게 그는 디올의 바이커 재킷(오토바이 탈 때 입는 재킷)과 빛 바랜 녹색 마스카라, 블루 매니큐어, 여기에 50년대 마릴린 먼로의 머리색깔로 염색까지 시켰다.
그리고 수년전 그를 처음 찾아왔을 때만해도 조신한 가정주부 스타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이 여성 고객은 말한다. “이제 보보랑 나랑은 똑같은 샤핑 취향을 가졌어요.”라고.
이런 매니아 고객군단을 거느리면서 그는 그의 고객들만큼이나 경제적 안정도 찾았다.
회사 규정상 자신의 연봉에 대해 함구했지만 최근 그가 인터뷰한 한 패션잡지에서는 샐러리가 아닌 커미션 베이스인 그의 연 수입을 대략 25만~40만달러쯤으로 추정했다. 단순히 튀는 패션감각과 좋은 대인관계만으로는 결코 벌어들일 수 없는 액수다.
이런 그의 이런 독특한 이력은 미국사람들 눈에도 신기하게 보였나 보다.
내년쯤 그는 ‘보보는 최고를 안다(Bobo knows best)’라는 책을 출판할 예정이다. 뉴욕타임스 패션 매거진에 난 그의 기사를 본 한 뉴욕 출판에이전시가 그에게 오랜 구애작전을 펼쳤고 올해 그가 오케이 사인을 보냄으로써 성사된 일이다. 현재 그는 책 출판을 위해 작가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책은 그의 작은 자서전 겸 실용서를 겸한 책이다. 18세때 모델이 되겠다는 야무진 아메리칸 드림 하나 달랑 가슴에 품고 무작정 도미한 이 말라깽이 아가씨의 아메리칸 드림과 패션리더로서의 어드바이스를 책 속에 담을 예정이다.
“좀 쑥스럽지만 그냥 담담하게 이야기할려고요. 지금껏 살아온 내 이야기랑 그리고 무엇보다 어떻게 옷을 입을까 고민하는 여성들을 위한 작은 지침서가 됐으면 하는 심정으로 말이죠.”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이번 책 출간을 계기로 서울방문을 계획중이다. 서울에서도 한국어판을 출간하는 것이 그의 바램이기도 하다.
“한국을 떠나온 지 20년이 넘었는데 그간 한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제일 가보고 싶은데요? 제주도요. 그리고 무엇보다 맛있는 한국 음식들을 실컷 먹고 오렵니다.”
그의 씩씩한 열정 이면에 도라지꽃 닮은 애잔한 향수가 묻어난다. 그러나 그 쓸쓸함도 잠시, 이내 밝아진 그가 다시 재잘대기 시작했다. 10년쯤 뒤 다시 그를 만나도 그는 변한게 없을 듯 싶다. 지금껏 그래왔던 것처럼 현재에 안주하기보다는 여전히 10대 소녀 눈빛을 하고 세상 속을 달음박질치고 있을테니 말이다.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높게 말이다.
<글 이주현 기자·사진 진천규 기자>
<퍼스널 샤퍼, 도대체 어떤 일 하나>
매 시즌마다 고객들 하나 하나의 패션 취향과 체격을 고려해 드레스며, 수트며, 핸드백, 구두까지 미리 샤핑을 해 제공하는 것이 그의 일이다.
인터뷰를 위해 찾아간 니먼 마커스 2층 그의 오피스도 한쪽 방은 옷걸이마다 옷들이 한아름씩 걸려 있었다. 걸려 있는 옷이며 핸드백들은 이달 보그나 엘르 광고에서 보았던 명품 브랜드들. 인터뷰 도중에도 그의 고객들은 끊임없이 ‘보보, 보보’를 외쳐댔고 그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져야 고객들은 안심하고 물건값을 치렀다.
이런 고객들에 대한 믿음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거저 얻어진 것은 아니다.
시즌 시작 전, 백화점에서도 구매에 나서기도 전 그는 밀라노로, 파리로, 뉴욕으로 쫓아다닌다. 패션쇼를 돌면서 유행경향도 미리 파악하려는 목적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파악도 전에 그의 패션 안테나는 고객들의 취향에 벌써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면 패션쇼 무대 위를 걷고 있는 것은 모델이 아니라 어느새 고객들의 얼굴이다.
그러면서 그는 중얼거린다. “음, 저 고객에겐 이번 시즌 저 옷을 꼭 입혀야겠군.”
그의 바지런함은 여기서 그치질 않는다.
그의 사전에 없는 옷이란, 없는 사이즈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의 말마따나 시즌 히트 아이템에서 평균 사이즈의 옷을 찾아내기란 ‘대학교 졸업장’을 따는 것처럼 만만한 일이 아니지만 그는 기필코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찾아 고객 손에 쥐어주고 만다. 니먼 마커스가 취급하지 않는 옷도 예외는 아니다. 고객이 원한다는 그 한마디에 세계 어디라도 발품을 팔아, 심지어 자비를 털어서라도 반드시 구해놔야 스스로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다.
타고난 붙임성이라고 하기엔 어딘지 좀 거만하다 싶을 만큼 도도하고, 왠지 거리감이 느껴진다 싶으면 소탈하게 조근조근 말 이어가는 폼새가 정겹고. 아마도 그는 타고난 퍼스널 샤퍼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누라 뭐래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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