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바깥의 어느 지역보다도 한국인이 많다는 LA는 한의학에 있어서도 특수지역임에 틀림없다. 한의학의 위상이 잘 정립되어 있다는 본국에서보다도 한방병원이 더욱 밀집되어 있고 한방과 관련한 선전이 눈에 자주 띤다.
가주는 미국 내에서 한의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주이며(약 50%), LA는 그 중에서도 한의학의 중심지라 아니할 수 없다. 올해에 들어와 한의학과 한의사와 관련한 뉴스가 심심지 않게 언론에 회자되면서 마치 가주의 정책방향이 한의학의 위상을 위협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것 같아 우려를 금할 수 없다.
특히 지난 10월 8일에 있었던 슈워제네거 주지사의 일부 주하원 발의안에 대한 거부권 행사가 마치 한의학에 결정타를 가하는 정책변화인 것 같이 보도가 되어 이 직종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반대중에게 혹시라도 잘못된 인식을 심어주게 될까 걱정이 앞선다.
이번에 주지사가 행사한 거부권은 두개 법안에 관한 것인데, 그 하나는 한의사의 진단권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한의사의 조무사(assistant)의 자격에 관한 것이다. 후자는 그리 시급하지도 중요하지도 않다고 판단되므로 이 글에서는 전자에 대해서만 간단히 짚고자 한다.
AB-1113(주 하원 발의안-1113)은 한의사(Licensed Acupuncturist)의 진단권(Diagnostic Authority)을 한의사의 진료범위에서 명문화하여 허가하자는 취지의 법안으로서 상하 양원을 통과하여 주지사에게 상정되었으나 거부권행사로 무산되었다. 주지사의 거부권 행사의 명분으로서는 ‘아직도 한의사의 진료범위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주지사는 ‘만일 침술치료에 관련한 진단권을 한의사에게 부여하는 법안이라면 서명하겠다’는 의견도 피력하였다. 금번 주지사의 거부권 행사로 인해 종전에 비해 달라진 것은 없다. 단 이러한 사건을 계기로 좀더 거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어떤 주에서보다 아시안 커뮤니티의 규모가 큰 가주에서는 한의학과 양의학을 비롯한 개별의료부문간의 이해다툼이 첨예화할 수밖에 없다. 올해 들어와 한의학 관련 법안들이 상정되어 법제화되거나 거부권이 행사되거나 폐기 또는 연기되는 등 우여곡절이 일어나 언뜻 보면 마치 한의학의 위상이 흔들리거나 위축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인상을 갖게 된다.
필자는 이러한 세간의 시각과는 반대의 의견을 갖고 있다. 이러한 표면상의 우여곡절은 그만큼 가주 내에서 한의학과 한의사의 힘이 커졌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척추전문의도 이보다 더한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날 미국 내 의료산업에서 무시할 수 없는 지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애초에는 돌팔이(Quackery)라는 오명을 쓰고 출발하였으니 한의학의 현재 위치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의료부문이 전문가의 영역이라 하더라도 환자를 떠난 의료는 존재의미가 없고 따라서 각 의료분야는 궁극적으로 환자들이 평가하는 진료효과와 안전도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한국과 달리 특정 이해집단의 저항이나 집단행동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미국에서는 시간이 걸리기는 하겠지만 정책은 결국 환자의 복리가 우선되는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본다. 특히 1945년 이후에 태어난 소위 전후세대들이 이제 막 은퇴하기 시작하였고 감염성 질병보다는 퇴행성 만성병이 주요 병증인 상황에서는 한의학의 일정한 역할은 불가피해 보인다.
문제는 오랜 동양문화 전통에서 발달한 한의학이 주류사회의 기준과 시각에 얼마나 신속하게 적응하여 한의학을 명실공히 미국화 시키느냐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본다.
이제 한의사, 협회, 한의과 대학은 실력양성과 타 커뮤니티와의 유기적 협조 등을 통해 주어진 기회를 십분 활용해야 한다. 또 필요하다면 전문적인 로비 활동도 해야 할 것이다. 새크라멘토의 의사당에 몰려가 시위를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동양의 훌륭한 문화유산을 소중히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책무는 우선적으로 한국인 한의사들을 포함한 동양인 한의사들에게 주어져 있다.
이제 한의학의 역할 증대는 동양인 커뮤니티의 유기적인 협조와 주도적인 노력이 없이는 더 많은 견제와 간섭이 불가피해 보인다. 한의학은 그만큼 성장하였고 이제는 본격적으로 어른 노릇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김진선
동국 로얄 대학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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