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물상자를 정리하다가 누렇게 찌든 신문 한 장이 나왔다. 1982년 12월11일자 한국일보 ‘문학사 탐방’ 26호인데 김용성 작가가 썼다. 아마 그때 신문이 오자 제목만 훑어보고 더 자세히 읽어볼 양으로 접어 두었던 것이 이리저리 돌다나니 20여년이나 지난 지금에야 눈에 띄게된 모양이다.
대문짝 만한 ‘민족의 비극과 병행한 갈등의 궤적’이란 타이틀 위에 가서 동그라미를 치고 붙어있는 ‘황혼의 노래의 이석훈’이란 활자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이석훈 작가를 만난 것은 단 한번뿐인데 그날 이작가의 장남인 호우와 세 사람이 나란히 앉아 ‘무도회의 수첩’이란 불란서 영화를 본 기억이 새롭다.
호우를 알게된 것은 그 학교 신문관계의 대표가 기숙사에 와서 나더라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우리 신문에 한마디 써달라”고 하기에 “나는 우리 학교를 대표할 만한 학생이 아니니 쓸 수가 없다”하고 돌려보냈던 것이 화근이 되어 “이대 기숙사 도라짱(학생때 내 별명)이 도도하고 무섭다 하니 말 좀 해보자’며 6~7명의 서울대 학생들이 우르르 몰려온 일이 있었다.
그 중에 의대학생이 한 명 있었는데 대표의 소개에 의하면 대단한 문학 청년인데 이름이 호우라고 했다. 나는 “호랑이에게 날개까지 달렸으니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몸이 그렇게 커서야 하늘을 나를 수 있을까 모르겠네”하고 싱거운 소리 한마디했더니 다들 배를 움켜잡고 웃는 바람에 따지러 왔다던 분위기가 확 녹아버렸다.
호우는 그들 중에서 가장 키가 크고 체격도 좋았으나 얼굴을 붉히는 모습이 애송이로 보였다. 며칠후 호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금남의 성’에서의 반나절이 너무나 행복했노라며 자기는 장남인데 남동생만 셋이고 여자 동기가 없으니 누님으로 모시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기숙사에서 하는 일이 너무 많았다. 종을 치고, 사무보고, 잔심부름도 너무 많았으며 학교 공부도 있다. 다른 학교 학생 때문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그의 편지를 무시해버렸다. 비슷한 편지가 두어 번 더 온 후 하루는 자기를 좀 도와 달라면서 두둑하게 쓴 편지를 전하고 갔다.
그것을 열어본 나는 섬짓한 생각이 들었다. 마치 우울증 걸린 사춘기 소년이랄까. 인생에 대한 불안감, 마음에 없는 의학 공부를 부모님 얼굴을 봐서 억지로 하고 있는 괴로움 등등으로 한때 자살까지 생각하였노라며 리로 정연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호소하고 있다.
‘벌써 새벽이 왔나 봅니다. 전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말미에 적혀있는 글을 보고 ‘이 학생 안되겠구나 의대생이 공부는 접어두고 편지 쓰기에 밤을 새다니…’ 회답을 쓰기로 했다.
나는 처음부터 ‘호우’라고 불렀다. 2년이나 손아래 ‘보이’에게 딴 마음이 없다는 뜻이었다. 두뇌 명석하고 성실한 성격의 문학 청년이 곁에 사람이 없어 혼자 속앓이만 하고 있는 것이 안됐다 싶어 격려해 줘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돌이켜보면 웃음이 저절로 나는데, 그날도 편지를 두둑하게 써 가지고는 부치지 않고 들고 왔다. 우편으로는 날자가 걸리니 그때 기분을 그대로 전하고 싶어 들고 왔단다. 아마 노서아 문학에 심취해있었던지 열어보니 이런 대목이 있었다. ‘트로이카를 타고 누님과 끝없는 설원을 달리고 싶습니다’ 나는 웃음이 나는 걸 참지 못했다.
“이봐요 호우, 나는 추위에 약하거든. 트로이카는 감기 걸릴까봐 사양하겠어. 꼭 덩치 큰 어린 애라니까”
그는 고모님을 어머니보다 좋아한다면서 ‘냉면을 해줄 테니 친구를 데리고 오라 하셨다’고 자꾸만 조르는 통에 따라갔다. 종로 뒤쪽 한옥 집에서 평양식 냉면을 맛있게 먹고 고모님이 ‘개구리참외’를 깎으시며 “글쓰는 이석훈이레 내 동생이야”라고 말씀하셔서 호우가 문장력이 좋은 것은 내력이구나 생각했다.
‘무도회의 수첩’이란 영화가 와서 기숙사에서 야단들이었다. 나는 표 살 돈이 모자라 단념하고 있었는데 호우가 헐레벌떡 달려와서 영화 보러가자고 하기에 따라 나섰다. 서소문에 자연장이란 다방이 있었는데 그가 앞서서 다방에 들어가더니 자욱한 담배 연기를 헤치고 맨 끝 테이블까지 가서 “아버지 누님을 모셔왔어요” 하지 않는가? 하얀 정복을 입은 해군 소령이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사전에 아무 말도 못 듣고 영화를 보자는 말에 좋아라 따라 나섰던 나는 그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화가 났으나 절대 절명! 도리 없이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길 건너 동양극장에 가서 나란히 앉아 영화를 보고 기숙사에 돌아온 나는 호우가 보낸 엄청 많은 편지들을 꺼내 보며 결심을 했다. “그는 여자 친구가 필요해졌으나 나는 아니다. 어울리는 하급생을 찾아주고 ‘누님’노릇에 종지부를 찍는 거다”
호우를 마지막 본 것은 내가 약혼한 것을 알고 축하한다며 왔을 때이니 1950년 초였을 것이다. 6·25가 터지고 적들이 퇴각하며 대학병원의 의대생들을 몰고 갔다는데 아직껏 그의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다.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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