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열 관장과 부인 조디씨가 옛날 연애담을 들려주며 활짝 웃고 있다.
태권도 입문 1년만에
첫 데이트 두달만에 결혼
한인 이정열·미국인 아내 조디 커플 이색 러브스토리
이 부부, 사는 모습이 정겹다. 알콩달콩 깨 볶는 소리 요란하진 않지만 보면 볼수록 흐뭇하다. 어느새 쪼르르 달려와 안기는 올망졸망한 아이들까지, 초가을 석양 무렵 따스한 가족풍경이 파스텔톤처럼 번져간다. 평생 태권도 사범으로 살아왔다는, 이소룡을 닮은 작고 다부진 한국인 노총각과 라카냐다 토박이인 이 벽안의 아가씨가 결혼하기까진 꽤 곡절 많은 사연이 숨어 있을 법해 보인다. 아니, 절절한 사연까진 아니더라도 그에 버금가는 러브스토리 한 자락쯤은 들을 수 있어 보이지 않는가. 그러나 웬걸? 밀고 당기는 뜨거운 열애 끝 양가부모의 반대 꽤나 겪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둘이 들려주는 11년 전 발생한 연애담은 싱겁기(?) 그지없다. 만난지 두 달만에 그냥 결혼을 했단다. 도대체 이 세상 결혼 치고 ‘그냥’이라는 게 어디 있겠냐고 조근조근 따져 물어도 그저 웃기만 한다.
이정열 관장이 수업중 넘어진 한 학생의 다리를 살펴보며 태권도 기술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건 1992년 당시 이정열(44) 관장이 사범으로 있던 패사디나의 한 도장에서였다.
부인 조디(37)씨는 그때 막 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교사 임용을 앞두고 있던 차였는데 어려서부터 동양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태권도를 배워보려 그 도장을 찾았다.
그렇게 1년쯤 스승과 제자로 그저 눈인사만 하고 지내던 이들이 인연을 맺게 된 건 당시 도장 관장이 주선한 점심식사 자리 덕분이었다. 그리곤 이 수줍음 많은 정열씨가 용기를 냈다. 그로부터 2주 뒤. 둘은 한 해변가에서 첫 데이트라는 걸 했다.
정열씨는 “그때 이미 결혼을 결심한 것 같다”며 “만나자마자 당시 내가 불체자 신분이라는 거, 가진 것도 없다는 거, 뭐 이런 현실에 대해 늘어놓았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첫 데이트에서 자신이 불체자라는 걸 서두로 이야기를 꺼내는 남자도 있나? 로맨틱까진 아니더라도 첫 데이트 풍경 치곤 꽤 생소해 보인다.
이에 대해 조디씨는 “그래도 그때 남편은 참 자상했다”며 “일식당에 갔었는데 먼저 식당 문도 열어주고 와사비도 간장에 개어주고 했었다”며 웃는다. 그러면서 “그 정도면 로맨틱한 거 아니냐”며 오히려 반문한다.
‘나는 불체자 신분’고백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조디씨에게 가장 중요한 결혼의 조건은 외모도, 경제력도, 학벌도 아닌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몇 번의 만남을 가지면서 조디씨는 정열씨가 ‘정신이 건강한 남자’라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고.
그는 “운동을 하면서 스승으로 보아온 그는 반듯하고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였다”며 “평생 함께 한배를 타고 한 목적을 가지고 수십년을 살아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고 수줍게 말한다.
어찌됐든 이 둘은 두달 뒤 결혼한다. 의사였던 조디씨 부친의 걱정이 있긴 했지만 양가의 극심한 반대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결혼 후 조디씨는 라카냐다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정열씨는 태권도 사범으로 그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고 6년 전 드디어 꿈에도 바라던 라크레센타 풋힐 길 위에 현재의 도장을 개관했다.
그리고 그 사이 조디씨의 태권도 실력도 일취월장하여 현재 그는 태권도 4단, 합기도 3단의 실력 있는 사범이 돼 프리스쿨 유아들과 여성반을 가르치고 있다.
이씨는 아내의 실력에 대해 “태권도가 한국 무술이긴 하지만 백인들이 작정하고 배우면 워낙 기초체력이 좋아 깜짝 놀랄 만큼 실력이 빠르게 는다”며 “아내 역시 체력도 좋을뿐더러 태권도를 좋아해 더 이상 내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라고 추켜세운다.
태권도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조디씨의 한국 요리에 대한 애정 역시 유별하다.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는 기본이고 웬만한 한국음식은 순식간에 뚝딱 만들어낸다. 물론 미국음식을 즐기지 않는 남편을 위해 갈고 닦은 실력이긴 하지만 그녀 역시 한국음식을 즐긴다. 그리고 그 요리솜씨는 마카로니와 소시지가 들어간 김치찌개, 두부와 완두콩이 들어간 볶음밥 등 한국 퓨전요리를 만들어 내는 ‘경지’까지 이르렀다.
이뿐 아니다.
아이들에게 어른들을 만나면 허리 숙여 인사하는 법을 가르치고, 남편 친구들이 몰려오면 ‘정말 체질에 맞지 않지만’ 한국 여느 주부들처럼 요리해서 대접하기도 하며, 시댁 어른들이 모처럼 방문하면 몇박 며칠을 붙어 여행도 함께 다니고 시중도 들만큼 10년 새 그는 반 한국인이 다 됐다.
한가지 더. 그의 태권도 사랑이야말로 공인 9단이다. 시종일관 나지막하게 말하던 그가 태권도 이야기가 나오자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조디씨는 “지금까지는 미국에서 태권도의 이름을 알리는데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면 이제는 인지도와 영향력을 높여 가는데 많은 한국인들과 도장들이 노력해야 할 시기인 것 같다”며 “태권도를 제대로 가르치는 것 못지 않게 미국인들의 입맛에 맞는 서비스와 시스템을 갖춰 우리끼리만 하는 무술이 아닌 주류사회에도 더 많이 보급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래서 조디씨는 앞으로 정열씨와 함께 미국인들이 많이 모이는 협회 활동과 대회에도 적극 참석할 계획을 세워놓고 있는 등 태권도 홍보대사로 팔 걷어붙였다.
한결같은 태권도 사랑으로 하나가 돼 어느새 11년을 함께 한 이 부부, 가끔 서로의 모국어가 달라 불편하지만 눈빛만 봐도 이젠 속내를 훤히 읽을 경지에 이르렀다.
부부를 2인3각 경기중인 선수들로 치자면 이처럼 척척 호흡을 자랑하는 팀도 흔치는 않을 듯 싶다. 앞으로 11년, 또 11년이 지나도 이들이 펼치는 경기는 지금처럼 늘 척척 호흡, 흥미진진 그 자체가 아닐는지. 함께 묶은 두 다리가 타고 날 때부터 하나인양, 세상이라는 경기장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있지 않을까.
<글 이주현 기자·사진 서준영 기자>
<한국인 남편·미국인 아내의 싸우는 법>
이정열 관장과 부인 조디씨가 운영하는 도장에서 아들 재규(9)군과 재미(5)양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포즈를 취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렇지만 정열씨는 전형적인 한국인 1세 남성이고, 조디씨는 생김새 만큼이나 전형적인 미국 현대 여성이다.
사실 같은 한국인들끼리도 결혼해 살면서 같은 한국말을 나누지만 행간의 말이 통하지 않고, 삶의 방식이 틀려 갈등하고 싸우는 게 예사인데 이들 부부는 말해 무엇할까 라고 예측해 보지만 이 예측은 처음부터 보기 좋게 빗나갔다.
정열씨는 “처음부터 다른 문화가 결합한다는 전제가 있어 반반씩 양보해 균형을 맞춰가자고 약속했다”며 “지금도 문제가 생기면 싸운다기보다는 서로 양보를 통해 합의점을 찾아가는 편”이라고 비결을 공개했다.
그래서 이들 부부는 뭐든 공평하게 나눠서 한다. 특히 요리는 아내가 점심을 차려내면 저녁식탁은 에누리없이 남편 몫이다. 신혼 땐 가사노동 분담이라는 것이 이씨에게 익숙지도 않았고 잘하지도 못했지만 지금은 요리만큼은 아내보다 한 수 위란다.
그러나 아무리 가사노동을 알뜰하게 분담하는 잉꼬부부라 해도 부부싸움은 피할 수 없는 법. 한국인 남편·미국인 아내의 부부싸움 풍경은 어떨까.
정열씨는 “최근엔 그럴 일도 없지만 예전에 심하게 싸운다 싶으면 내가 한국말로 막 말하고 아내는 이에 질세라 스패니시로 화를 냈다”며 “그러다 보면 둘 다 알아듣지 못하는 그 상황이 기가 막혀 서로 쳐다보고 웃다보면 그냥 화해하게 된다”고 털어놓는다.
부부싸움 만큼이나 힘든 건 바로 아이들 교육 문제. 조디씨는 “교육문제는 정말로 문화적 차이가 있는 것 같다”며 “아이들 훈육에 있어 남편은 즉흥적이고 참을성이 없는 편”이라며 슬며시 흉을 잡는다. 그러면서 그는 “정말 부부싸움이라곤 특별히 하지 않고 살아왔는데 아이들이 크면서 교육방침, 야단치는 법, 야단치는 기준 등이 한국식, 미국식으로 나뉘어 의견충돌을 가져왔다”며 “물론 이제는 이 역시 중도를 찾았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제는 교육은 내 책임 하에 있다”며 웃는다.
서로 다름의 차이를 인정하고 거기에서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다 보면 특별히 싸울 일도 없다는 것이 이들 부부가 세상 모든 부부에게 들려주는 화목한 가정의 비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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