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스쿨
노동절 연휴와 함께 긴긴 여름방학도 끝나고 아들은 학교로 돌아갔다.
우리가 한국서 학교 다닐 때 3·1절 바로 다음날 새 학년이 시작되었듯이, 미국서 자라는 아이들은 노동절을 기점으로 새 학년 새 학기를 시작한다.
올해 백 투 스쿨은 과거 어느 때보다 신경이 쓰였다. 아들이 드디어 고등학교에 입학했기 때문이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몇몇 학교에 원서를 냈던 아들은 USC 메디칼센터 부설인 ‘브라보 매그닛’ 하이로 진학하였다. 한인들에게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매그닛 스쿨인데, API 평균성적이 상당히 높고 오리엔테이션 때 만난 교사들의 열의가 매우 뜨겁고 진지해 마음에 흡족하게 느껴지는 학교다.
문제는 학생들 거의 대부분이 히스패닉이어서 한국아이를 비롯한 아시안은 찾아보기 힘들다는 점이다. 부모 마음이란게, 한국아이들이 너무 많아도 싫지만 너무 없어도 불안한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래도 어떡하겠나. 어차피 캘리포니아 특히 LA는 머잖아 히스패닉 세상이 돼버릴 것이니 미리부터 적응시키자, 하고 마음 편히 갖기로 했다.
아들은 올 여름방학을 지나면서 부쩍 컸다. 키도 크고 얼굴이 길쭉해졌으며 목소리는 완전히 깊은 저음으로 변해버렸다. 하루가 다르게 크는 모습이 내가 봐도 낯설게 느껴질 정도라 오랜만에 보는 사람들은 깜짝 놀라 다시 보곤 한다.
얼굴엔 여드름이 한창이고 팔다리 여기저기에 털도 숭숭 나기 시작했다. 키가 쑥 올라가면서 배둘레햄도 많이 빠져서 언제 뚱뚱하다고 걱정했나 싶게 날씬해졌다. 아들만 쳐다보면 히쭉히쭉 웃음이 나오는 것이, 저게 다 내가 키워놓은거지 싶어서 그저 대견해지는 것이다.
백 투 스쿨 전에 아들 방을 치워준다고 시작한 청소가 노동절 연휴에 온 집안을 다 뒤집어엎는 대청소로 발전했다.
아들 방의 옷장은 그동안 아들 옷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남편과 나의 안 입는 옷들이 잔뜩 걸려있었다. 바닥과 선반에도 집안의 온갖 잡동사니가 꽉꽉 들어차 있었으니, 아들의 옷장은 우리집 창고였던 셈이다. 아들이 쓰는 욕실도 마찬가지여서 빨래거리를 그곳에 쌓아두고는 샤워와 목욕을 우리 욕실에서 하도록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어른이 되었는데 언제까지 엄마아빠와 욕실도 같이 쓰고 옷장도 같이 쓰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잖아도 애가 착해서 그동안 그러고 있은거지, 웬만한 애들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것이다.
옷장과 욕실을 완전히 비워주려고 ‘방빼’는 작업을 시작하니 그 안에 있던 것들을 다 버리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다. 그것이 다른 옷장과 창고들, 심지어 부엌의 스토리지 룸까지 연쇄적으로 청소해야하는 상황으로 발전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에게는 살면서 전혀 필요치 않은, 아니 그런걸 갖고 있었는지조차 전혀 모르는 짐들이 너무 많다.
이번에는 이불 짐을 가장 많이 내다버렸다. 해가 바뀌거나 계절이 바뀌면서 침대 세트와 컴포터를 바꾸는 일이 잦은데 한번 새로 장만하고 나면 전에 쓰던 것은 결코 다시 쓰지 않으면서도 멀쩡한 세트를 버릴 수가 없어 뭉텅뭉텅 쌓아두게 된다.
그렇게 적지 않은 공간을 차지했던 컴포터를 여섯 개나 처분했다. 또 담요 대여섯장, 쿠션 몇개, 침대 시트와 베개 세트는 얼마나 많이 버렸는지 세어보지도 않았다.
그 외에도 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수많은 물건들을 내다 버렸다. 아들의 책상과 서랍, 방 구석구석에서 엄청난 장난감 쓰레기가 나왔고 나의 옷장과 부엌에서도 묵은 짐들이 한없이 나왔다.
끝없는 쓰레기더미를 계속 운반하면서 “휴일인데 제발 좀 쉬자”고 통사정을 하던 남편은 아들 방이 표나게 깨끗하고 훤해지자 갑자기 생색을 내기 시작한다. “야~ 원겸아, 이거 봐라! 너 아빠한테 땡큐 안해?”
연휴를 그렇게 보내느라 백 투 스쿨 샤핑은 시작도 못했다. 아들도 이번 주 학교에 다니며 다른 아이들이 입고 신고 들고 다니는 모양을 살펴본 후 다음 주말에나 사겠다고 한다. 과목마다 필요한 학용품도 일단 수업이 시작된 후에야 사야할 것이니 이제는 또 사들일 것이 한 짐이다.
이제 4년 남았다. 피차간에 4년만 고생하면 아들은 부모의 품을 벗어나 넓은 세상으로 나갈 것이다. 그러면 나는 늘 바라던 대로 자유스러워질까, 아니면 매년 이맘때 신문 오피니언 난을 장식하는 빈둥지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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