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상영중인 짐 자무시 감독의 ‘꺾어진 꽃들’(Broken Flowers)은 중년의 돈 환 빌 머리가 익명의 여인이 분홍종이에 써 보낸 편지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편지는 이 플레이보이의 19세난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 집을 나섰다는 것.
글을 읽은 돈 환은 자기도 있는 줄 몰랐던 아들의 어머니의 정체를 확인하려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과거의 여인들과 재회하면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는 향수감 짙은 영화다.
할리웃은 편지가 중심 플롯으로 등장하는 영화들을 옛날부터 적지 않게 만들어왔다.
‘꺾어진 꽃들’처럼 익명의 여인이 보내온 편지가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모르는 여인의 편지’(Letter from an Unknown Woman·1948·사진)는 짝사랑의 아픔을 사무치도록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다. 슈테판 즈바이크의 소설이 원작으로 여인의 심리를 섬세하고 꿰뚫어 보듯 묘사한 비련 영화의 극치이다.
비엔나의 바람둥이 미남 피아니스트 스테판(루이 주르단)이 모르는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를 읽으면서 얘기는 15년전으로 돌아간다. 이 글은 14세 때부터 스테판을 혼자 사랑해 온 리사(조운 폰테인)가 죽음의 침상에서 쓴 편지. 남자는 편지를 읽고 나서 자기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 여인이 자기 삶에 얼마나 중요한 구실을 했던가를 뒤늦게 깨닫는다.
익명의 편지를 주제로 한 또 다른 명화는 프랑스의 앙리-조르지 클루조가 감독한 ‘갈가마귀’(Le Corbeau·1943). 시골로 이주한 파리 출신 의사에 대한 악성루머 편지(포이즌 펜 레터)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공포와 비밀과 배신과 의혹의 스릴러다. 이 내용은 나치점령 하 프랑스의 시민들간의 이간질과 모함 등을 은유적으로 경고한 것이다.
친구에게서 온 편지 때문에 세 주부가 전전긍긍하는 ‘세 아내에게 보내는 편지’(A Letter to Three Wives·1949)는 삼삼한 코미디 드라마. 친구들인 세 행복한 주부(린다 다넬, 앤 소던, 진 크레인)가 유람선을 타기 직전 다른 친구에게서 온 똑같은 내용의 편지를 받는다. 친구는 이름을 안 밝힌 채 세 주부의 남편 중 하나와 사랑의 줄행랑을 놓는다고 통보하는데 이를 읽은 세 여인은 저마다 그 남자가 과연 내 남편(폴 더글라스, 커크 더글라스, 제프리 린)일까 하고 조바심을 친다. 아내의 입장에서 본 결혼과 의심과 두려움에 관한 명화로 오스카 감독상과 각본상을 받았다.
편지가 주요 플롯인 화끈한 영화가 열대지방 멜로 드라마인 ‘편지’(The Letter·1940)다. 서머셋 모음의 소설이 원작으로 주인공 베티 데이비스가 정부를 총으로 사정없이 사살하는 아찔한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요부는 어수룩한 남편에게 정당방위라고 둘러대나 이 여자가 정부에게 보낸 편지 때문에 궁지에 몰리게 되는 관능적인 영화다.
편지 중에 가장 멋있는 편지는 연애편지. 사람을 안 보고도 그가 보낸 편지 때문에 사랑에 빠지는 경우는 영화뿐 아니라 실제로도 있다. 글의 마력 탓이다.
‘연애편지’(Love Letter·1945)의 싱글턴(제니퍼 존스)도 글만 보고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 2차대전 때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된 앨란(조셉 카튼)은 친구 로버트의 부탁으로 그의 고향의 여자 싱글턴에게 보내는 편지를 대필해 준다. 싱글턴은 이 편지 때문에 로버트와 결혼하나 그녀가 진정 사랑하는 남자는 앨란. 싱글턴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서야 참 사랑을 얻게 된다. 빅터 영의 주제곡이 감미로운 감상적인 영화다.
이 내용은 코주부 시라노가 자기가 사랑하는 록산을 연모하는 말과 글 주변 없는 미남 청년 크리스티앙을 위해 연서를 대필해 주는 얘기를 닮았다.
사이버시대인 요즘에는 연애편지도 컴퓨터로 써 보낸다고 한다. 참으로 몰감정적이요 비낭만적인 연애행위다. 탐 행크스와 멕 라이언이 나온 역겨운 로맨틱 코미디 ‘편지 왔어요’(You’ve Got Mail·1998)에서는 둘이 e-메일로 펜팔을 하다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는 지미 스튜어트와 마가렛 설래반이 나온 우아하고 매력적인 ‘모퉁이의 상점’(The Shop Around the Corner·1940)의 신판. 겨울 부다페스트의 같은 상점서 일하는 두 남녀가 익명의 펜팔로 사귀다가 사랑에 빠진다는 크리스마스 단골 영화다.
팻 분이 노래한 ‘모래 위에 쓴 연애편지’는 파도가 지우고 말 편지. 그래서 팻 분은 모래 위에 쓴 편지 위로 파도가 칠 때마다 찢어진 가슴이 아파한다고 징징됐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애편지는 구스타프 말러가 자기 아내 알마에게 보낸 음악 연애편지. 말러는 교향곡 제5번의 제4악장 아다지에토를 알마에 대한 사랑의 고백으로 썼다. 간장을 끊듯 애절하고 하늘의 것처럼 신성하고 로맨틱한 선율이다. 이 교향곡이 23일 하오 8시 할리웃 보울서 레너드 슬래트킨의 지휘로 LA필에 의해 연주된다.
박흥진
편집위원 /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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