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쏟아지는 벌판에 서서
미국생활에서의 첫 도전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그 자체를 교훈으로 받아들이며
무너진 몸과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이끌어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라인댄스를 아십니까?-
오른 쪽으로 하나, 둘, 셋, 넷(박수 짝!)
왼 쪽으로 하나, 둘...
우리 ADHC(Adult Day Health Care, 양로 보건센터)에 오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하루라도 이 리듬에 맞춰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섭섭해 집으로 돌아가실 생각을 안 하십니다.
미국 이민 17년차인 나의 일과는 이렇게 마무리됩니다. 나는 이 곳의 액티비티 코디네이터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25년 전인 1980년, 나는 처음으로 그토록 동경하던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1974년 2월 이화여대 사범대학을 졸업한 후 서울의 한 사립여자 중학교 사회과 교사 6년 7개월의 생활을 접고 종합상사 뉴욕 지점에 근무 발령을 받은 남편과 함께 세 살, 두달짜리 두 딸을 데리고 내 마음의 신대륙, 그 모습과 대면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1년동안 뉴욕생활은 30년 가까운 한국에서의 내 모든 생활방식과 사고를 미국에 적용시키기 위한 시간이었고, 남편의 L.A지점 이동으로 캘리포니아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L.A에는 일찍이 결혼과 함께 자리잡은 나의 언니, 형부가 있었으므로 우리 가족은 정말로 즐거운 시간을 지낼 수 있었습니다.
1983년 3년의 미국 근무를 마친 후 귀국 발령을 받은 우리는 잠깐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큰아이는 유치원에 잘 적응하여 다니고 있었고 나도 미국생활에 어느 만치 익숙해졌으니까요
더욱이 귀국하면 다시 오기 힘들다는 주변의 사람들의 만류와 조그만 비용을 들이면 비자를 변경해 주겠다는 변호사의 권유 등을 힘들게 뿌리치면서 회사의 명령대로 귀국을 했습니다.
다시 돌아간 한국에서의 약 4년간의 삶은 또 많은 변화를 겪어내야 했습니다. 무섭게 올라버린 부동산 가격과 특히 활동적인 내 성격이 나를 집에 묶어 두기가 어려웠습니다.
L.A에 있었던 동안에도 혼자 되신 아버지를 모셔와 우리 집에 사시게 했으므로 나는 다운타운에 있는 친구의 봉제공장을 도와주었습니다.
다시 학교에 교직을 가지려 해도 쉽지 않았습니다. 중학교 강사로 일을 갖게 되었고 동료 교사의 소개로 입시학원에서도 강의를 했습니다.
우리 큰딸은 한국말이 서툴러 대학부속 유치원에 넣었지만 매일처럼 아이들의 놀림으로 울며 돌아왔습니다. 곧 국민학교에 입학한 후에도 맞춤법이 부정확하여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또한 남편은 남편대로 귀국 처음에는 그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가 힘들었는지 가끔은 미국생활 얘기를 회상하곤 했습니다.
왠지 한국에서의 삶이 힘들게 느껴질 때마다 다시 미국으로 가고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동안 언니의 초청으로 준비한 이민 순서가 되었습니다.
-LA 희망의 노래-
1987년 9월 12일
우리 네 식구는 이민자로서 다시 미국에 들어왔습니다. 주재원 신분으로 머물렀었던 지난 시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긴장되고 한편 불안하기까지 느껴졌습니다. 남편도 많은 생각에 잠긴 듯 비행기 안에서 식사도, 잠도 제대로 취하지 못하는 눈치였습니다.
마흔 한 살의 남편, 내 나이 서른 다섯.
결코 젊다고만 할 수는 없는 나이에 새로운 출발점에 선 것이었습니다. 언니가 미리 정해준 글렌데일의 2베드룸 아파트에 짐을 풀었습니다. 다행한 것은 전에 L.A에서 살았던 경험으로 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도 일주일동안 운전면허, 보건소, 사회보장 사무실 등의 모든 업무를 갖추고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아이들 학교였습니다.
한국에서 4학년,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온 아이들은 각각 5학년, 2학년에 입찰을 시켜 놓았습니다. 자, 이젠 우리 차례였습니다.
미국 이민을 올 때 다음 세 가지 조건 중 하나만이라도 갖춘다면 어려움이 없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첫째, 나이가 젊다 둘째, 특별한 기술이 있다, 셋째 돈이 많다. 아무리 꼽아 보아도 우리 부부에게는 어느 하나도 해당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새로운 공부를 하기에는 젊지도 못하고, 특별한 기술은 커녕 벽에 못박는 일 조차도 손수 하지 못하는 무재주의 대명사인 남편, 대학 졸업 후 15년을 무역회사 수출 담당 부서에서만 일하였으니 무역업무 이외에 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 또한 중학교 교편생활로만 이어 온 터라 막막했습니다. 그렇다고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가져온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우리에겐 무슨 일에라도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고 어떤 환경에 부딪히더라도 헤쳐 나아갈 준비된 의지가 큰 밑천이었습니다. 한국을 떠나올 때 주변의 많은 친지들로부터 우리 부부는 아프리카 사막 한 가운데 떨어뜨려 놓아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늘 노력하며 살아 왔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마침 남편의 친구분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동생이 큰 봉제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얼마 전 뇌출혈로 쓰러져 치료중이라는 것, 그래서 공장을 처분하여야 하며, 우리에게 인수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어봤습니다.
잠깐 망설였지만 큰 돈 들이지 않고 우리 비즈니스를 해 보자는 생각으로 이민 생활 2주만에 우리는 봉제 공장주인 아줌마, 아저씨가 되었습니다. 지난 번 친구 봉제공장의 매니저로 일했던 나의 경험을 떠올리며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습니다.
항상 우리들의 삶 속에서는 우리가 예측하고 계산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막연하긴 했지만 우리의 미국생활이 바느질공장으로부터 시작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공장 일은 그런 대로 바쁘게 돌아가고 우리 부부는 늦도록 뒷마무리와 밀린 일감을 집으로 끌고 와 밤을 지새며 쳐내곤 했습니다. 한달 여를 정신없이 살다 보니 아이들이 엉망이었습니다.
피곤한 몸에 짓눌려 정작 아이들에게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습니다. 공장에서 돌아올 때면 늦은 시간인데도 아이들은 아파트 파킹랏 시멘트 바닥에서 한국 아이들과 어울려 맨발로 고무줄 놀이에 정신이 없었고 별로 예쁘지 못한 모습으로 느껴졌습니다.
자칫 울 부모가 그야말로 “생존”에 매달려 정말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마저 들었습니다. 정신을 차려 남편은 공장 일에 몰두하고 나는 많은 시간 아이들과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번들 더미를 옮기던 남편이 허리를 다쳤습니다. 설상가상으로 며칠 후 위티어에서 큰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이후 걷잡을 수 없이 일은 얽혀 돌아갔고 공장 재봉사들은 나오질 않으니 모든 순서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결국, 3개월 만에 우리는 모든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치고 시간을 끌며 미련을 둔다는 것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습니다.
미국생활에서의 첫 도전에서 우리는 철저하게 실패했다는 자괴감도 들었지만 그 자체를 교훈으로 받아들이며 무너진 몸과 마음을 추슬렀습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며 이끌어 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경제학 전공인 남편이 “사업은 여자와 입을 노려라”라는 설을 내세우며 먹는 장사를 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나는 펄펄 뛰며 반대했습니다. 절대로 우리 둘이서 할 수 없음을.
서로 성격이 180도 정 반대이며 남편은 요리나 부엌일과는 관계가 없고 느리긴 또 왜 그리도 느린지 둘이서 먹는 장사를 하다간 부부사이에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벌어질 것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자금의 여유도 없이 조그마한 패스트 푸드밖에는 번듯한 레스토랑은 꿈도 못 꿀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둘러보아도 마땅히 할 것이 없었습니다.
신문 광고를 찾아 족히 30개가 넘을 가게들을 돌아다니며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LA 서북쪽 밴나이스 라는 곳에 위치한 아주 작은 핫도그 가게를 인수하게 되었습니다.
-”HAPPY DOGS” 목표를 향한 달리기-
1988년 5월 1일부터 1998년 10워 31일까지의 10년 5개월 동안의 이곳은 우리 삶의 터전이었고 우리 가족의 꿈이었으며 살아있는 우리의 역사로 지금도 내 마음 안에 자리하고 잇습니다.
미국 이민 6개월만에 새로운 출발점으로 힘찬 발걸음을 내 딛으며 우선 가게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한국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지역이라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영어를 익히기에 좋았습니다. 이 후 작은딸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두 아이들은 주말과 방학이면 가게에 나와 캐시어로서 쿡으로서 도와주며 그야말로 온 가족의 비즈니스였습니다. 우리 부부도 처음 인수했을 때보다 거의 두 배에 이르는 매상증가를 기록하며 열심히 열심히 일했습니다.
생전 처음 만들어 보는 핫도그, 햄버거, 프랜치 프라이, 각종 샌드위치였지만 아주 정성껏, 새벽시장에서 싱싱한 채소를 구입하고, 늘 손님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귀기울였습니다.
시청과 연방정부건물이 있는 관공서 지역이어서 많은 공무원들이 단골이었는데 우리는 늘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려 애썼고, 그들의 전화주문 목소리를 먼저 알아 차려주고, 그들의 먹는 기호를 낱낱이 기억해 놓아 각기 입맛에 맞도록 최선의 노력을 하며 일해나갔습니다. 그 사이 두 아이들은 고맙게도 건강하고 착하게, 그리고 학교생활도 충실히 잘 자라주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가게 뒤편 패티오에서 숙제하고, 책 읽고, 도와주며 힘들지만 사랑하며 화목한 가족으로 지냈습니다.
큰딸은 UCLA와 HASTING 법대를 졸업하여 변호사로 일하며 역시 변호사인 남편(우리사위) 한국엄마와 미국아빠를 반씩 닮은 아들(손주)과 행복합니다. 작은 딸도 서부의 명문 포모나 대학을 졸업한 후 상담심리학자로 어려운 마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0년 동안 부부가 한 곳에서 장사를 하며 서로 부딪히며 겪은 어려움은 밤이 새어도 끝이 없을 이야기입니다. 뜨거운 그릴을 끌어안고 죽도로 열심히 일했던 그 시간들이 내겐 무엇보다도 소중하고 감사하며 잊지 못할 은총이었습니다.
그사이 장사가 어느 만치 궤도에 오른 약 4년 후부터 나는 주말한국학교 교사로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우체국에 근무하던 때를 제외하곤 거의 10년 가까이 지금까지도 일하고 있습니다. 때론 힘들다고 느낄 때도 있지만 이곳에서 자라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한국의 얼을 넣어준다는 보람 속에서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한국학교로 향합니다.
한편 가게를 운영하는 동안 우리 부부는 건강유지를 위해 마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스스로 건강보험을 들기에는 너무 부담이 많은지라 마침 우리성당의 한 교우 부부가 마라톤을 열심히 하시는 것을 알고 그분들의 도움을 받아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4분의 1마일도 한번에 달리기가 힘들었지만 규칙적으로 연습하며 호흡방법과 뛰는 요령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지도를 받아 점점 먼 거리를 달렸습니다. 차츰 성당 교우들이 알게되고 마라톤 동우회를 구성하여 일요일이면 함께 공원에 모여 훈련을 했고 1999년 LA 국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여 많은 회원들이 완주를 하였습니다.
26.1마일... 나는 여섯 시간을 달려 목표점을 밟았습니다. 실로 마흔 일곱 살의 내 인생의 고통과 좌절이 모든 순간들을 마라톤 코스 속에서 겪으며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각오로 뛰었습니다.
우리 아이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정말 어려운 이민 1세대의 부모로서 항상 용기와 희망과 노력으로 삶을 개척하며 시련을 극복해 나아가는 자세를.
작은딸아이가 12학년이 되자 나는 차츰 가게를 벗어날 궁리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젠 남편과 따로 일하고 싶었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이들로부터도 조금은 해방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 가게에 매일처럼 우편물을 전해주고 점심도 먹는 우체부에게 이런 저런 궁금함 것을 물었습니다.
알려준 대로 나는 우체국 채용시험을 치렀습니다. 몇 개월 후 인터뷰 통지가 왔습니다. 연방 우정국 공무원이란 직업에 매력도 느꼈습니다. 채용 업무는 집배원이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내 마음엔 우체부란 직업이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낭만적이라고까지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를 인터뷰한 우체국 관리는 나이 마흔 여섯의 키작은 동양여자를 앞에 놓고 여러 번 반복하여 정말 할 수 있겠는지를 질문했습니다. 나는 적극적으로 대답했습니다. 나는 건강하고, 집 주소도 잘 찾을 수 있고, 무거운 소포도 잘 들 수 있고, 무엇보다도 열심히 하겠다고...
1차 인터뷰를 통과하고, 신체검사를 마치고, FBI 신상조사도 끝났고 2주간의 연수에 들어갔습니다. 둘러봐도 내 나이의 동양여자는 없었습니다. 나처럼 영어가 서투른 사람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수 내용이 어려운 것들은 옆 사람에게 도움을 청하며 집에 와서 복습, 예습 정말 애타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마지막 시험은 운전이었습니다. 뒤가 꽉 막힌 먹통 우편트럭, 기어가 잘 들어가지도 않은 고물 짚차. 이 두 가지 차령을 운전해야 했습니다. 낮선 차 오른쪽 핸들을 잡고 기를 쓰고 연습 도 연습 어려움 끝에 모든 연수과정이 끝나 우체국 근무발령을 받았습니다. 실제 일에서 겪은 어려움, 상사들과의 갈등, 편지가 너무 무겁고 특히 매일 5-6마일 이상을 걸어야하는 고통으로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마라톤 연습으로 단련되었다는 체력도 매일 노동 속에서 한계를 느껴 몸무게가 20파운드나 줄었습니다. 좀더 젊은 나이에 시작했더라면 좋았었겠습니다. 베네핏도 있고 보수도 괜찮은 편이라서 힘이 들어도 적응하며 오랫동안 지킬 생각이었는데 그것도 내 뜻대로는 아니었습니다. 신장염에 걸리게 되어 의사는 큰일난다며 쉴 것을 종용했고 조금은 아쉬움으로 3년만에 우체부 제복을 벗었습니다.
이제 나는 아주 힘든 일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번엔 오래 전 가게를 하며 야간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수료하여 받은 유아교육원장 자격증을 가지고 “어린이집”(Child Daycare)을 시작했습니다. 꼬마들이 몰려들었고 국민학생들은 방과후 교실로 분류하여 남편이 맡아 공부를 도와주었습니다. 이 일도 3년이 지나고 나니 꼬마들이 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어 방과후 교실로 옮겨지게 되었습니다.
오전시간이 한가해진 나는 신문을 통해 ADHC라는 시설에 관해 알게 되었고 매일 매일 오시는 노인 분들이 즐겁고 활기차게 건강을 유지하도록 모든 활동내용을 관리하고 계획하는 코디네이터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또한 자격증이 필요한 일이라서 36시간의 교육과정을 이수하여 수료증을 받았습니다. 실로 쉰 두 살에 또 하나의 자격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KBS어린이 합창단에서 국민학교 시절을 노래 속에서 살았으며 대학에선 통기타를 배워 학교행사에 곧잘 나서곤 했습니다. 또한 성당의 성가대 지휘도 맡은 적도 있고 야외에 나가면 항상 마이크 잡고 게임을 진행하는 일도 내 몫입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 속에서 나도 머지않아 노년의 나이에 들어서게 될 테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내 갖고 있는 모든 탤런트를 동원해서 버몬트 양로보건 센터에 오시는 할머니, 할어버지들게 보다 즐겁고 활력 넘치는 행복한 하루가 되시도록 마이크를 잡고 섭니다.
이것이 내 생애의 마지막 직업이길 희망하면서...
-오늘 또 새로운 햇빛-
돌아보니 미국생활이 2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크게 돈을 벌어 성공했다던가, 내 자신 큰 명예를 이룩한 것도, 내세울 만한 공적도 내겐 없습니다.
이 순간까지 앞만 바라보며 하느님께 의지하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에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떳떳함이 있습니다.
오늘은 목요일, 고등학교 동문 합창단 연습에 나가는 날입니다. 금요일 저녁이면 어김없이 6년째 우리부부는 성경공부 반에 참석합니다. 그냥 하루하루를 단순하게 행복한 마음을 갖고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부부가 우리 자신들을 위해 마련한 노후대책이 있습니다. 우리 집 뒷마당이 꽤 넓은 곳이라서 지난해에 방 다섯 개와 목욕탕 두 개를 넣어 집을 지었습니다.
각각의 방에 미국인 독신들이 세 들어 살고 있답니다. 어느 날 내일이 너무 힘겹게 느껴지면 조용히 그 동안 밀린 책읽기와 여행, 그리고 친구와 많은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그때 내 아이들에게 손내밀지 않기 위해 준비한 것입니다.
아 오늘도 어김없이 햇빛은 온 땅에 쏟아져 내리며 우리를 축복합니다. 땅속으로부터 마음껏 끌어올린 양분과 햇빛으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일은 결국 나의 몫입니다.
나는 오늘도 햇빛 내리는 넓은 벌판을 힘차게 달려갑니다.
김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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