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학년 때 여름방학에 나는 텅 빈 기숙사에서 그 큰 건물을 혼자 지키고 있었다. 방학이 되면 으레 학생들은 다 집으로 돌아가고 사감선생과 부엌 아줌마들 중 개성댁만 남아있었는데 그때 마침 사감(김옥길)선생이 건강검진을 위해 동대문 병원에 들어가시게 돼 대신 내가 맡게 되었다.
화강암을 쌓아올린 희멀건 4층 건물은 어두워지면 덩치 큰 괴물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으나 아침이 오면 사위는 싱싱하게 살아난다. 하늘을 찌르는 노송이 빽빽이 들어서고 가지각색의 꽃나무들이 우거진, 드넓은 이화 동산을 마음껏 목청을 돋우어 노래 부르고, 시 구절을 읊으며 헤매어도 거칠 것이 없는 나만의 시간과 공간! 천국이 따로 없음을 감사하는 매일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동산 소나무 밑을 헤매던 나는 문득 “울타리 밖으로 나가볼까?” 하고 오솔길을 벗어났다. 본관 건물을 왼쪽으로 쳐다보며 교문 쪽으로 내려가는데 반대로 걸어 올라오는 학생이 보였다. 생각조차 못했던 같은 반 이재순이 아닌가? 그녀는 “방학중이라 못 만날 줄 알았는데…” 몹시 반가워하며 내 손을 잡는다.
그녀가 아침부터 서둘러 기차를 타고 기숙사까지 찾아온 것은 “그냥 보고 싶어서…”라고 했다. 집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져서 새 학기부터 학비를 받을 수 없게 되었는데 마침 신학교에서 학비 면제로 받아주겠다 하니 그 쪽으로 갈 생각인데 학교를 그만 두면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왔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해줄 말을 찾느라 애를 쓰다가 겨우 한마디 “과장 선생님 댁에 가보자. 지도교수신데 인사를 드려야지” “난 그냥 아무도 안 볼 생각이었는데… 이 사람 저 사람 보면 미련이 생기잖아?” 그녀의 눈시울이 촉촉이 적셔오는 것을 보았다.
“그래, 넌 지금 관두면 안돼. 너무 아까워. 뎃상은 정확하고 작품엔 너만의 특징이 있어. 정말이야 계속 그려야해. 너는 꼭 훌륭한 화가가 될 사람이야!”
학교 후문 가까이 있는 과장 심형구 선생님 댁까지 걸으며 나는 그녀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처지임을 잊고 있었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림을 그만두지 말라는 충고가 아니라 돈이다. 나 자신 모르는 독지가의 온정에 매달려 기숙사에 들어왔고, 그 분의 사정으로 장학금이 끊기자 총장(김활란 박사)님과 사감선생의 배려로 기숙사에 눌러 있으면서 사무실에 내려가 아무 일이던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하며 보람을 찾는 고학생이 아닌가…
과장님은 댁에 계셨다. 재순이가 “저, 선생님“ 하고 운을 떼자 내가 나서서 들은 대로 설명을 하고 “재순이를 도울 길이 없을까요? 지금 미술을 단념할 순 없잖아요”
“글세, 분납제도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한참이나 생각하시더니 재순이에게 “분납이 허락되면 그냥 다닐 수 있지?” 하셨다. 나는 그날 이후 재순이에게 그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1949년 7월 우리 서양화과 7명은 함께 졸업을 하고 각기 일터를 정해 흩어졌다. 일산이 고향인 재순이는 개성여자고등학교의 미술교사로 들어가 기차로 통근한다고 들었다.(당시 개성은 한국땅)
6.25가 터지고 온통 세상이 뒤집히는 동안 나는 친구들의 소식을 모르며 살았다. 1.4후퇴 때 갓난아기를 안고 기저귀 가방 하나 달랑 들고는 트럭 꼭대기에 끼여 앉아 서울을 떠난 나는 1956년 봄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돌아와 보니 이재순이 인민군에게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지 않는가! 나는 그 때 참회의 눈물을 주체 못하며 여러 날을 두고 울기만 했다.
왜, 내가 그 여름날 마지막으로 보겠다며 기숙사로 찾아온 그녀를 과장선생 댁까지 데리고 갔던가? 그녀가 이대를 졸업했기 때문에 시골 논밭 사이의 간이역에서 통근하는 여고 미술교사는 확실히 눈에 띄는 존재였을 것이다. 신학교에 갔더라면 아직도 학생일테니 악마들의 주목을 받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그때 신학교에 가서도 너는 잘 할거라고 한마디 격려해주고 돌려보냈어야 했다. 내가 잘해주는 척 나섰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친구에게 그 끔찍한 죽음을 당하게 했다는 죄책감을 안고 평생을 산다.
그 해 여름, 꽃다운 나이에 이재순이는 그렇게 갔다. 나 때문에…
김순련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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