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대륙을 하나의 나라로 통합하는 신 로마제국의 꿈은 사라지고 말 것인가. 지난달 29일 프랑스의 국민투표에서 유럽연합(EU) 헌법이 부결된 후 1일에는 네덜란드의 국민투표에서 또 부결되어 ‘유럽합중국’의 미래는 불투명하게 되었다. 유럽연합의 가입국은 모두 25개국으로 독일, 이탈리아, 스페인 등 9개국이 이미 헌법을 비준했고 프랑스가 10번째, 네덜란드가 11번째로 비준 투표를 했다가 좌초되고 말았다.
영국은 내년에 비준 국민투표를 할 예정인데 이번 충격으로 국민투표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투표 자체가 취소했다. 유럽연합의 헌법은 회원국이 모두 비준해야 발효되는데 부결된 나라에서는 재손질된 헌법 내용으로 재투표를 실시할 수 있다.
그리고 헌법이 많은 나라에서 채택되지 못할 때는 헌법을 없애고 별도 협약으로 유럽연합을 유지해 나갈 것이라고 한다. 유럽연합 지도부는 유럽연합을 달성하기 위해 방법을 강구하겠다고 하지만 이번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헌법 부결로 연합 내의 문제점이 드러난 셈이다.
유럽의 각국은 정치적 차이, 경제적 격차, 기독교와 이슬람문화의 이질감 등 때문에 완벽한 통합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유럽연합의 태동은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대에 유럽국가간의 협력체였던 유럽 석탄철강 공동체, 유럽 원자력공동체, 유럽경제공동체(EEC)가 1965년 EEC 단일 공동체로 통합되었고 1997년에는 관세 동맹, 공동시장, 공동 농업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EC(유럽공동체)로 개편됐다.
그 후 유럽 통화제도를 발족하고 단일 유럽의정서를 체결하는 등 발전해 오다가 1991년 EC 12개국이 유럽연합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유럽연합운동이 본 궤도에 올 랐다.
유럽연합은 1993년 프랑스, 독일, 이태리,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6개국이 창설하여 그 후 12개국으로 확대됐고 1995년 15개국으로 늘었다. 이 해 유럽연합국의 정상회담은 유럽의 단일화폐인 유로화 창설을 결의하여 2002년 1월부터 유로화가 유통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4년에는 폴란드 등 동구 10개국이 가입함으로써 회원국이 25개국으로 확정됐다. 유럽연합은 애당초 경제협력에서 출발했으나 점차 정치적 통합의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미국과 같은 합중국의 형태를 띠게 될 유럽연합은 각국의 독립성이 강하기 때문에 단일국가로 발전하기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국제정치상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세계 최대의 블록 경제를 형성하기에 충분한 저력을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은 앞으로 미국의 영향 아래에 있는 나토에 버금 하는 유럽 방위기구를 창설할 계획이며 전 유럽인을 단일화하는 유럽시민제도를 도입한다는 야심 찬 계획도 세우고 있다.
이러한 유럽연합의 성패는 세계의 판도에 큰 영향을 줄 것이다. 유럽연합이 성공할 경우 인구나 경제력에서 미국을 훨씬 능가하므로 미국 경제에 의존하던 세계 경제가 유럽연합의 영향권으로 들어가게 될 수도 있다. 벌써부터 달러만을 국제 결제의 수단으로 쓰던 나라들이 유로화를 쓰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더욱이 최근 들어 미국의 패권에 불만을 가진 프랑스와 독일이 유럽연합을 주도하게 되면 미국은 국제무대에서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
산업혁명으로 시작된 자본주의 경제는 미국에서 완성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에서 싹이 튼 민주주의는 미국에서 꽃을 만개했다. 그리스시대 이후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던 유럽 문화도 미국의 현대문화 앞에서 힘을 잃어갔다. 미국은 경제력과 군사력을 배경으로 로마시대 이후 가장 강력한 국가를 형성하여 유럽에 대한 막강한 우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유럽연합이 성공할 경우 이와 같은 우열관계는 뒤바뀌어 세계의 패권이 미국에서 유럽으로 다시 넘어갈 수도 있을 것이다.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 이후 정치적, 경제적으로 경쟁적인 입장인 서구보다 동구 국가에 대해 접근정책을 쓰고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유럽에 대한 일종의 ‘Divide and Rule’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유럽연합의 좌초 위기는 미국으로서는 다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앞으로 장기적 안목에서 유럽연합의 향방에 주목하면서 대유럽 외교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기영
뉴욕 지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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