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적인 엄마와 털털한 딸이 나누는
엄마와 딸의 모습은 각양각색이다. 좋아하는 취향이나 성격, 외모 등이 꼭 닮은 ‘붕어빵 모녀지간’이 있는가 하면 모든 것이 서로 상반되는 성격이나 취향 때문에 사사건건 부딪히는 ‘앙숙형 모녀지간’도 있다. 수많은 엄마와 딸의 모습을 좀더 찬찬히 들여다보자. 여성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을 좋아하는 공주과에 속하는 엄마와 딸이 있는가하면, 털털한 성격이 남자 못지 않게 화통한 엄마와 딸도 있다. 어디 그뿐일까. 철없는 딸에 잔소리꾼 엄마나 성숙한 딸과 소녀 같은 엄마가 티격태격 살아가기도 한다. 세상의 다양한 딸과 엄마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엔 천차만별이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그건 다름 아닌 말로는 설명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둘만의 끈끈한 ‘유대감’이다.
엄마에게 뜨개질을 배우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어느새 작은 머플러는 금세 만든다.
어머니 승혜령씨
딸 승하은양
외모가꾸기 관심없어
수다스럽진 않지만
궁금한건 모두 털어놔
그렇다면
‘털털한 딸’과 ‘감성적인 엄마’가 빚어내는 모녀지간의 모습은 어떤 빛깔일까. 풀러튼에 살고 있는 혜령(헬렌 승)씨와 그녀의 딸인 하은(다이애나 승)양. 우리 이웃에서 평범하게 만나볼 수 있는 엄마와 딸의 모습이지만 만나보니 뜨개질을 함께 하는 두 사람 사이에도 역시 모녀지간 특유의 깊은 ‘유대감’이 흐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에서 고등학교 교사생활을 하다 결혼해서 이곳으로 건너온 이민 1세대인 엄마 혜령씨와 이곳에서 태어난 2세대 딸 하은양. 주말 한글학교 선생님이기도 했던 그녀는 이곳에서 태어난 딸 하은양을 키우면서 가장 중요시 여긴 것은 무엇보다도 딸아이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이었다.
일상적인 대화는 물론이고 딸아이가 점점 커가면서 마음속에 있는 고민거리도 서로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것이 엄마의 바람이었던 것. 그래서 하은양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그녀가 가르치던 한글학교 클래스에 데려다 놓고 직접 딸에게 한글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찌감치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덕분에 지금 하은양은 자유로이 한국말을 구사하는 것은 물론 한국어로 된 책도 읽고 글을 쓰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어릴 때부터 한글학교에서 일찍 한국어 공부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다행이 하은이가 다니는 학교에 외국어 선택 과목중 한국어가 있어서 요즘도 한국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어요. 어릴 때부터 집에서는 한국말만 쓰는 것을 원칙으로 했고, 2~3년마다 가능하면 한국에 가서 할머니와 친척들을 방문 했던 것이 효과적이었던 것 같아요”
엄마 덕분에 어릴 때부터 시작해 커다란 어려움 없이 공부한 한국어 덕분에 하은이는 1년을 월반하여 지금 12학년들과 함께 한국어 수업을 듣고 있다.
현재 풀러튼 지역의 서니힐슬 고등학교 11학년인 하은양은 다른 또래 여자아이들과는 달리 옷이나 화장품 등 외모 가꾸는 데 별 관심이 없다. 그런 딸을 두고 ‘털털하다’는 표현을 쓰는 엄마. 하지만 여느 딸들처럼 하은이는 엄마에게 학교 수업시간에 일어났던 재미있었던 일이나 친구들 사이에 요즘 유행하는 것 등은 물론 자신의 고민 거리도 종종 털어놓는 편이다. 성격이 ‘털털’한 편이라 여느 딸들처럼 먼저 엄마에게 다가가 재잘거리며 수다스럽진 않지만 딸과 친해지고 싶은 ‘감성적인’ 엄마가 궁금해하는 건 서슴없이 모두 얘기하는 편.
딸 하은양이 작업한 그래픽 디자인이 실린 학교 신문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다정한 모녀.
집 가까운 곳의 테니스 코트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 엄마 혜령씨와 딸 하은양.
또한 책읽기를 좋아하는 딸 하은이가 여기저기에서 읽은 흥미진진한 스토리들은 모두 엄마와 나눌 수 있는 무궁무진한 얘깃거리의 소재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학년이 학년이리만큼 엄마와 하는 얘기의 대부분이 공부에 관한 것이라 조금은 아쉽다.
그래도 하은이는 이런저런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는 엄마가 이제는 고맙다고 느낄 만큼 컸다. 엄마 또한 자신의 속내를 스스럼없이 드러내는 딸아이에게 얻는 것이 많이 있다.
특히 요즘 아이들의 관심거리가 무엇인지는 물론 딸이 관심 있어 하는 것을 대화 속에서 자연스레 캐치해낼 수 있어 다행이다.
“언젠가는 주변 남학생들에 관한 얘기를 하는데 유독 한 아이에 대해 다르게 얘기하더라구요. 직감적으로 ‘우리 딸이 그 아이에게 관심이 있나보구나’ 했지만 그냥 그 나이 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별 말은 하지 않았어요”
엄마의 감성적인 세심함이 드러나는 얘기다. 사실 ‘털털한 딸’ 하은이는 그때 엄마가 그런 눈치를 챘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면서 “제 말 하나 하나를 그렇게 유심히 듣고 있는 줄은 몰랐어요”하면서 씩 웃는다.
‘털털함’과 ‘감성적’인 것은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성격이어서 지금처럼 마냥 좋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모녀에게도 남모르는 갈등이 있었다. 하은이의 사춘기 시절 엄마와의 갈등이 폭발직전까지 갔던 것.
감성적인 엄마의 세심함이 딸에게는 귀찮게만 느껴진데다 ‘공부는 왜 해야 하고 대학은 왜 가야 하는지’ 인생 전방에 관한 물음도 생겼다.
엄마의 일상적인 관심에 하은양의 대답은 점점 퉁명스러워졌고, 급기야는 서로 하는 말마다 말다툼으로 번지고 대화가 단절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때가 10학년 시절. 하은이는 컴퓨터에 푹 빠져 공부도 등한시하고 웹 페이지 만들기나 컴퓨터 애니메이션에 푹 빠져 지내는 ‘반항기’에 돌입했다.
한창 공부해야 할 시기인 딸이 컴퓨터만 쳐다보고 있는 게 속상했던 엄마 혜령씨의 마음은 점점 조급해졌다. 하지만 조급한 마음을 표현할수록 딸과의 사이는 멀어졌다.
“너무 속상하고 걱정이 돼서 ‘마음 알아주기’라는 화법을 강의하는 부모 교실에 등록했어요. 직접적으로 야단치거나 의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랬겠구나’하며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예요. 그래서 딸아이가 하는 말마다 ‘그래, 그랬겠구나’했더니 ‘엄마 왜 자꾸 그렇게 말해?’하면서 웃더라구요”
‘부모교실’에 다니면서 마음 알아주기 화법을 배운 엄마 혜령씨가 느낀 것은 아이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아이에게 조급한 마음이 생길수록 그 마음을 감추고 ‘그랬겠구나’하면서 말로만이 아닌 진심을 담아 이해하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엄마가 그런 교훈을 깨닫고 있을 즈음, 하은이가 얻은 것은 일취월장한 컴퓨터 실력. 그 덕분에 지금 학교 신문인 아콜라드(Accolade)의 그래픽 에디터로 활약중이다.
그렇게 10학년을 마치고 11학년이 되면서 서서히 하은양은 나름대로 사춘기의 방황을 마쳤다. 서먹서먹한 엄마와의 사이를 자연스레 회복한 건 엄마에게 뜨개질을 배우면서부터. 다시 털털한 딸과 감성적인 엄마의 대화의 물꼬가 터지기 시작한 순간이다.
“친한 친구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근사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엄마가 예전에 머플러 뜨는 걸 봤어요. 그래서 엄마한테 가르쳐 달라고 하면서 다시 엄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되었어요. 이제는 학교나 친구들 얘기를 꼼꼼히 들어주시는 엄마에게 감사드려요. 그리고 또 한가지 엄마 덕분에 테니스를 치게 돼서 너무 좋구요”
어릴 때부터 딸아이가 책 읽는 걸 너무 좋아해 집안에만 너무 틀어박혀 있는 것 같아 걱정스런 맘으로 엄마가 권유한 테니스였다. 엄마 혜령씨도 하은양이 테니스에 취미를 붙일 때까지 코트에 나가 함께 뛰어다니곤 했다.
덕분에 지금은 하은이가 제일 좋아하는 스포츠가 테니스가 되었다. 스무 명 내외의 학생들로 구성된 서니힐스 고등학교 테니스팀은 소정의 테스트를 거쳐 선발하고, 합격하면 학교 대표 테니스 선수로 뛰게 되는 셈인데, 열심히 연습한 덕분에 현재 하은양은 학교 대표 테니스팀 선수로 활약 중이다.
“엄마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스포츠가 있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중간에 몇 번 너무 힘들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하면 할수록 재미있는 스포츠가 바로 테니스 같아요. 테니스 팀 친구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도 즐겁구요. 나중에 저도 딸 낳으면 테니스 가르쳐서 함께 칠거예요. 엄마가 저에게 해주셨던 것처럼요”
언젠가 어머니날, 딸 하은이는 ‘내가 걸었던 발걸음 하나 하나에 동행해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적힌 감사 카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엄마 혜령씨는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딸아이가 한해 두해 커가면서 철이 들어 이제는 엄마를 조금씩 이해하는 것 같다며 눈물을 글썽인다.
그런 감성적인 엄마에게 ‘엄마 갑자기 왜 그래’하는 털털한 딸. 이들 모녀가 함께 엮어갈 앞으로의 날들이 자못 궁금해진다.
<글 성민정 기자·사진 신효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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