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로 갤러리 주인으로 일인이역을 감당하고 있는 현스 아트 갤러리의 현정숙씨는 하루종일 ‘그림’만 생각하는 여자다.
한인 화랑 여성 파워
최근 남가주 지역에만 한인들이 운영하는 갤러리가 20개에 달한다. 특이한 건 활발한 전시활동을 펼치는 갤러리 주인들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 한인타운에서 가장 오래된 ‘앤드류 샤이어 갤러리’(대표 수잔 백)를 비롯해 라 브레아 애비뉴의 ‘사비나 리 갤러리’(대표 사비나 이), 레이크우드의 ‘갤러리 닷3’(대표 손청), 풀러튼의 아름다운 명소 ‘현스 아트 갤러리’(대표 현정숙)와 ‘4.19 갤러리’(대표 김영희), ‘윌셔아트 갤러리’(대표 서니 김), ‘리&리 갤러리’(대표 아그네스 이), 샌타모니카 버가못 스테이션의 ‘새라 리 갤러리’(대표 새라 이) 등 한인 화랑가는 그야말로 여성파워가 거세다. 예술작품을 일반 대중에게 소개하는 이들과 함께 갈수록 커지는 화상의 역할과 갤러리를 운영하는 참뜻, 전시홍보, 작품판 매에 얽힌 이야기를 나눠본다.
현스 아트 갤러리의 현정숙씨
큐레이터·화상에 작가 출신도… 작품 선정서 전시까지 도맡아
풀러튼에 위치한 ‘현스 아트 갤러리’(Hyun’s Art Gallery)는 작가의 예술 혼이 가슴 깊이 느껴지는 화랑 분위기에 향기로운 물감 냄새가 짙게 배어있는 산뜻한 공간이다.
개인전만 10여회 개최한 서양화가 현정숙(44)씨의 작업실이 갤러리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고, 2,650스퀘어피트 규모의 전시장 구석구석에 현씨의 손길이 닿아있다.
미국으로 이민 와서 작업실을 찾던 현씨가 한 눈에 반했다는 이 넓은 공간은 원래 굉장한(?) 창고였다고 한다.
가족을 총동원한 리모델링 공사를 거쳐 환한 햇살로 가득한 갤러리로 탄생시킨 이 공간에서 현씨는 거의 살다시피 한다.
매주 월요일 문화센터 강의를 빼놓고는 눈만 뜨면 갤러리로 나온다는 현씨는 그림밖에 모르는, 그림에 미쳐 아무 생각 없이 살기 때문에 행복한 여자다.
“손익을 따지자면 유명화가의 전시회를 기획해 작품 한 점이라도 더 파는 게 낫겠지만 전시 기회만 엿보는 젊은 작가들의 마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신인작가 초대전에 많은 비중을 둔다”는 현씨의 갤러리는 올해가 개관 2주년이 되는 해다.
비교적 짧은 기간임에도 한국 작가들 사이에 꽤나 유명해진 현스 아트 갤러리는 2003년 10월 미주한인 100주년 기념행사로 ‘한국작가 100인 초대전’과 ‘코리아 아트 페스티벌 2003’을 개최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자신이 작가라서 그림 파는데는 영 소질이 없을 줄 알았는데, 작품을 판매하는 비즈니스 수완도 좋다는 소리를 듣고 있어 의외라는 현씨는 “한 작품이 화가의 손을 떠난 뒤 갤러리를 통해 새 주인을 만나는 과정이 좋다”고 말한다.
유망한 신인작가를 초대해 일반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은 게 갤러리 주인의 입장이지만, 각기 다른 인지도로 인해 작품 판매 보장이 가장 힘들다.
그래도 작품 판매가 생각보다 잘 되면 전시회 수익금을 도움이 필요한 단체에 기부하는 통 큰 여자다.
“한국의 작가들이 미국으로 진출하는데 디딤돌의 역할을 하는 게 현스 아트 갤러리의 소명”이라는 현씨는 아트랜드 출판회사(Artland Publishing Co.)를 통해 인터넷으로 지클레이(판매용으로 만든 고급 인쇄된 그림)도 판매하고 있다.
갤러리 닷3의 손청 관장(오른쪽 끝)은 좋은 작품을 꾸준히 전시해 작가와 함께 성장하며 자생의 뿌리를 갖고 싶다고 한다.
▲갤러리 닷3의 손청씨
“전시와 문화강좌를 통해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인지 얘기를 나눌 수 있는 열린 공간이 있어서 아름다운 삶의 근거가 되었으면”하는 바람으로 ‘갤러리 닷3’을 운영한다는 손청(52) 관장은 미술을 전공하지도 않았고 전업주부로 살다가 갤러리 주인이 됐다.
“내 맘에 와 닿는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는 손씨와 대화를 나누다보면 손씨가 원하는 갤러리는 한마디로 대중미술관 같은 공간임이 느껴진다. 은근히 잰 체하는 미술공간이 아니라,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드나들며 위로를 받고 삶의 자극을 받는 친근한 공간.
8년 전 사진작가의 길로 들어서면서 마음 편히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현씨는 2002년 레이크우드 지역에 갤러리 닷3을 개관했다. 이후 다양한 장르의 작품전시회를 개최해온 갤러리 닷3는 특히 소중한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우리 그릇전, 옹기전, 규방 소품전 등 한국문화 전시회를 수 차례 가졌고, 지난해부터는 큐레이터로의 역할에 중점을 두면서 ‘한국 중견작가들의 미국 나들이전’처럼 굵직굵직한 전시회도 기획하고 있다.
사실 전시기획을 담당하는 큐레이터는 작가 선정, 도록 교정, 작품 운반, 홍보 등 온갖 격무에 시달려야 하는 고단한 일이지만, 손씨는 “전시 준비하는 것 자체가 신나는 일이기에 웬만한 어려움은 잊고 산다”고 말한다.
초창기 한국에서 운송해온 귀한 작품들이 세관검사에 걸리는 바람에 전시기간을 놓치는 불상사를 겪은 탓에 무엇보다 작품 운반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손씨는 오는 7월 갤러리를 샌 피드로의 아티스트 디스트릭으로 이전하면서 전문 화랑경영인으로, 큐레이터로 자리매김할 계획이다.
▲사비나 리 갤러리, 사비나 이씨
한인타운 화랑가의 터주대감 같은 존재가 ‘사비나 리 갤러리’(Sabina Lee Gallery)의 사비나 이(52) 관장이다. 1993년 타운에 사비나 리 갤러리를 개관한 이래 13년째 한인 작가들에게 작품전시의 장을 제공해온 이씨는 쉰을 넘긴 나이지만 20대 못지 않은 열정과 흡인력 있는 대인관계로 갤러리 운영에 사랑을 쏟아 붓고있다.
“갤러리의 작은 문턱 사이로 크게 벌어진 미술과 일반인의 간격을 조금이나 좁혀보려는 마음으로 정말 열심히 했다”는 이씨는 2003년 10월 사비나 리 갤러리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주류 화랑들이 밀집해있는 라브레아 애비뉴로 갤러리를 이전했고, 설치미술가 강익중 개인전을 열어 주류 미술계와 매스컴의 대단한 주목을 받았다.
초기 10년은 화랑에 오면 반드시 그림을 구입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문 앞에서 서성이는 한인들의 소매를 잡아끌어 화랑의 문턱을 낮춘 게 그녀의 역할이었다면, 이젠 주류 미술계에 사비나 리 갤러리의 위상을 높이는 게 앞으로 그녀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씨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 어려서부터 그림이 인생의 전부였지만, 결혼 후 자녀 뒷바라지를 하면서 그림과 점점 멀어져갔다. 갤러리를 운영하고 싶다는 막연한 소망을 늘 가슴에 품고 있던 이씨에게 아담한 공간 하나가 생겼고 얼른 사비나 리 갤러리를 오픈했다.
기쁜 마음으로 화랑 문을 열었지만, 막상 갤러리 운영을 해보니 쉽지 않았다는 이씨는 전시기획을 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적도 있고, 예상외로 작품 판매가 잘 안되거나 사소한 이유로 작가와의 관계가 틀어졌을 때는 “뭐 하러 이 고생을 하나싶어 몇 번이나 그만둘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좋아서 하는 일이기에 또 다른 전시회를 벌이는 걸로 보람을 찾는다는 이씨는 “갤러리가 그림 판매를 하는 상업적 공간이라 가까이하기 부담스럽다면 미술관, 박물관이라도 자주 찾아 그림과 더불어 사는 여유를 갖기 바란다”고 강조했다.
▲윌셔 아트 갤러리, 서니 김씨.
갤러리가 많아졌다는 건 한인타운에도 그림 장사가 좀 된다는 의미인지 궁금해질 무렵, ‘윌셔 아트 갤러리’(Wilshire Art Gallery)의 서니 김(54)씨를 만났다.
김씨는 큐레이터가 아니라 그림을 파는 사람, 즉 화상이다. 지난해 2월 타운 중심가에 대형 갤러리를 개관했을 당시만 해도 작가들에게 갤러리 일부를 전시공간으로 제공할 계획이 있었지만, 그냥 그림을 파는 화상으로 남기로 했다.
윌셔 아트 갤러리는 꽃 그림의 대가인 브라이언 데이비스(Brian Davis),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프랑스 화가 조애니(Joanny), 디즈니 만화가로 유명한 피터 엘렌쇼(Peter Ellenshaw) 등 주류 미술계에서 인기를 누리는 유명 화가들의 지클레이 혹은 원본을 판매하는 공인 딜러다. 인테리어 매거진 ‘캘리포니아 홈스’(California Homes)에도 여러 번 소개됐을 만큼 주류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화상이다.
“새 집이나 사업장을 장만한 한인들이 요즘은 그림액자를 많이 구입해 간다”고 말하는 김씨는 공간별 그림 고르기에 익숙하지 못한 이들을 대상으로 홈쇼(home show)를 해준다. 고객의 취향에 맞는 그림 몇 점을 골라 직접 벽에 걸어준 후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을 구입하도록 도와주는 것. 결국 미술작품은 대중적으로 다가가야만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인들은 500달러 대의 그림을 가장 많이 산다고 설명한 그녀는 작품성을 보기보다 무조건 싼 그림만 찾을 때는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런 취향까지도 다 수용해 적절한 그림을 걸어주는 것이 진정한 화상의 역할이라고 소개했다.
<글·사진 하은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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