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느다란 콧수염을 한 미남 액션스타 에롤 플린이 날렵한 동작으로 칼바람을 일으키는 흑백영화 ‘시 호크’(The Sea Hawk·1490·사진)는 아마도 스와시버클러 중 최고 걸작일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중학생 때 서대문의 동양극장서 봤는데 인생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까지도 당시의 흥분감을 잊지 못하고 있다.
특히 어네스트 콘골드의 스릴 있고 의기양양한 음악을 배경으로 플린과 그의 불구대천의 원수 헨리 대니얼이 장시간 벌이는 마지막 펜싱 결투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명결투 신이다. 나는 꼬마 때 둘이 싸우는 모습이 거대한 하얀 벽에 활동사진처럼 그림자로 투영된 장면을 보면서 영화마술에 넋을 잃었었다.
이 영화의 감독은 마이클 커티즈(카사블랑카). 그는 플린의 첫 주연영화로 그를 대뜸 스타덤에 올려놓은 또 다른 흑백 걸작 스와시버클러 ‘블러드 선장’(Captain Blood·1935)에서 이미 이런 촬영수법을 써먹었었다. 여기서 플린의 칼에 찔려 죽은 사람은 역시 플린이 나온 ‘로빈후드의 모험’과 타이론 파워 주연의 ‘조로의 마크’등 여러 스와시버클러에서 악인역을 단골로 맡았던 명배우 바질 래스본이다.
워너 홈 비디오(WHV)가 최근 ‘시 호크’와 ‘블러드 선장’ 및 총천연색이 눈부신 ‘엘리자베스와 에섹스의 사생활’(The Private Lives of Elizabeth and Essex·1939)등 3편의 스와시버클러와 ‘그들은 장화를 신은 채 죽었다’(They Died with Their Boots On·1941)와 ‘다지 시’(Dodge City·1939) 등 2편의 웨스턴을 한데 묶어 ‘에롤 플린: 시그니처 선집’(Errol Flynn: The Signature Collection)으로 내놓았다. 이 DVD 박스 세트에는 터너 클래식 무비즈(TCM)가 제작한 플린에 관한 기록영화 ‘에롤 플린의 모험’이 부록으로 수록돼 있다. 이 5편은 플린의 최고 걸작들로 박스세트 가격은 60달러. 별개로는 20달러.
커스터 장군 얘기인 ‘그들은-’을 제외한 나머지 4편은 모두 커티즈가 감독했다. 그리고 ‘블러드 선장’과 ‘그들은-’과 ‘다지 시’에는 플린과 8편의 영화에서 공연한 올리비아 디 해빌랜드가 나온다. 플린은 디 해빌랜드(‘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의 멜라니 역으로 잘 알려진 그녀는 현재 89세로 파리에서 살고 있다)를 매우 사랑했으나 디 해빌랜드는 그가 유부남이어서 그 마음을 거절했다고 기록영화에서 말했다.
또 이번에 출시된 세트중 ‘시 호크’ ‘블러드 선장’ 및 ‘엘리자베스와-’등의 음악은 모두 오스트리아 태생의 뛰어난 고전음악 작곡가로 나치 박해를 피해 할리웃으로 건너온 콘골드가 작곡했다. 서정적이면서도 당당한 위풍을 지닌 교향적 영화음악들이다(안드레 프레빈 지휘하는 콘골드의 영화음악 CD는 도이체 그라모폰에 의해 나와 있다).
1909년 호주의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태어난 플린은 30~40년대 할리웃의 최고 스타였다. 쏘는 듯한 시선과 입술을 말아 올리는 유혹적인 미소에 체조선수처럼 날렵한 동작을 구사했던 절세 미남 액션모험 배우였다.
플린 하면 칼싸움과 술과 여자와 마약이 생각나는 것도 그가 이런 것들을 잘 하고 잘 누렸었기 때문이다(최근 개봉됐던 영화 ‘비행사’에 주드 로가 플린으로 나와 그의 이런 특징을 표현했었다.) 플린의 전처 패트리스 와이모어는 “그는 카메라를 위해 태어났다”고 말할 만큼 플린은 타고난 배우였으나 자기파괴적인 성질 때문에 50세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통속적인 것을 멸시한 플린은 플레이보이라는 이미지와 펜싱 영화에의 단골 출연으로 사람들이 자기를 진지한 배우로 여겨주지 않는 것을 늘 안타까워했었다. 그러나 플린의 삶의 기쁨으로 충만한 멋진 연기는 그가 시도한 심각한 영화에서보다는 이들 펜싱 영화에서 활짝 피어났던 것이 사실이다.
로맨틱한 풍운아였던 플린은 그 매력 때문에 ‘태즈메이니아의 악마’라고 불렸었는데 별명답게 1942년 미성년자와의 섹스로 재판에 회부됐으나 무죄 방면됐었다. 그러니까 플린은 역시 미성년자와 섹스를 해 재판 받기 전 프랑스로 튄 로만 폴란스키의 선배인 셈이다.
이번에 나온 플린의 세트는 뛰어난 화질에 다양한 부록이 수록 돼있다. 올드 팬은 물론이요 어린 자녀들에게도 할리웃의 옛 영광을 말해 줄 훌륭한 세트다.
박흥진 편집위원
hjpark@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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