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트리의 추억
지난 주말 집에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하였다.
우리는 매년 12월초 생나무 트리를 사다가 장식하면서 성탄 분위기에 돌입하곤 하는데 올해 그 내용이 조금 달라졌다. 작년까지만 해도 트리를 실어나르기 좋은 SUV 자동차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져 생나무 사오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참에 나는 ‘이제부터 한번 사면 계속 쓸 수 있는 인조 트리를 사용하자’고 주장하였으나, 아들은 ‘그래도 어떻게든 생 트리를 사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아이는 셋이서 나무 고르러 다니는 재미, 끙끙대며 실어와 나무를 세우고 물을 주는 일들, 집에서 풍기는 향긋한 소나무 냄새, 그런 것들이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환경문제까지 들썩이는 나를 이기지 못한 남편과 아들이 결국 큼직한 인조 트리 박스를 사오는 것으로 생 트리 대 가짜 트리 논쟁은 일단락 되었다.
가짜 트리는 장식하기가 훨씬 쉬웠고, 해놓고 보니 생나무보다 멋있어 보였다. 생나무는 가끔 좌우 균형이 안 맞기도 하고, 어느 부분은 가지 숱이 적어서 이 빠진 듯 보이기도 하는데 잘 만들어진 인조 트리는 키도 훤칠하고 나뭇가지도 무성했으며 균형도 잘 맞았다.
하지만 당연히, 향긋한 솔냄새는 나지 않았고, 나뭇가지를 만질 때마다 느껴지는 플라스틱 질감이 낯설게 여겨졌다.
그런데 그 가짜 트리의 낯선 촉감 속에 문득 떠오르는 어린 시절의 추억, 그리고 아버지 생각이 났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는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인조 크리스마스 트리 제조사업을 하신 적이 있다. 작은 구멍이 잔뜩 나있는 길다란 나무 막대기를 쇠 삼발이에 끼워 세우고, 가짜 나뭇가지 수십개를 구멍 여기저기에 끼워 맞추면 소나무 모양이 되는 트리였다.
아버지는 “집집마다 트리를 쉽게 만들 수 있는 이 사업이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셨고 우리도 기대를 잔뜩 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대 실패였다. 배고픈 1960년대 후반 한국에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사다가 장식하는 가정은 거의 없었던 것이다. 팔리지 않은 인조 트리 박스가 집안 가득히 쌓여있던 풍경이 아직도 나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그리고 우리는 해마다 그 트리들로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곤 하였다.
아버지는 재주가 많고 머리도 좋으신 분이었지만 이처럼 시대 상황에 맞지 않는 사업을 벌이셨다가 망한 적이 많았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세계 어린이 동요집’을 출판하셨는데 그 책은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는 훌륭한 동요집이었다. 세계 각나라의 동요 수백곡을 모은 노래책으로 아버지가 한국어로 직접 번역하여 가사를 붙이셨고, 미국에서 좋은 종이를 수입하여 군데군데 컬러로 인쇄한 장정본이었다. 1, 2, 3 권을 한 질로 묶은 세트가 상당히 비싼 가격으로 서점에 나왔던 것을 기억한다.
아버지는 “전세계 어린이 노래들을 하나로 모은 책은 전세계에서 처음일 것”이라며 흥분하여 대히트를 공약했으나 그것도 대실패였다. 그때가 1970년대초, 한국동요도 많지 않던 시절에 누가 아이들에게 외국동요를 가르치고 배울 생각이나 했을 것인가.
나의 기억에는 없지만 언니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는 또 60년대 초에 자동차 매연을 줄이기 위한 공기정화장치 ‘에어로졸’ 사업도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자동차도 많지 않았고, 매연이 얼마나 나쁜지도 알지 못하던 시절에 그런 사업을 하셨으니 결과는 뻔했던 것이다.
돈 잘 버는 의사 아내를 둔 아버지는 그 외에도 끊임없이 사업을 벌이셨는데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진 사업 빚을 갚느라 평생 고생하셨던 어머니는 갈수록 규모가 커지는 사업과 실패의 뒤치다꺼리를 열다섯번 이상 하셨다고 넋두리하시던 기억이 난다.
공부도 많이 하셨고 멋쟁이였으며 젊은 시절부터 워커힐을 중심으로 한량 생활을 하셨던 아버지는 좋은 남편이 못 되었고 좋은 아버지도 못 되셨다. 그 시절 많은 남자들이 그러했듯 가정에는 신경 쓰지 않았고 바람도 많이 피우셨기 때문이다.
자랄 때는 아버지 원망을 많이 했는데, 지금에 와서 한 인간으로서의 아버지를 돌아보니 기인이고 호인이었으며 시대를 20년쯤 앞서 살아가신 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인조 크리스마스 트리, 자동차 매연방지 장치, 어린이를 위한 세계동요집, 이런 것들을 80~90년대에 만들어 내셨더라면 아마 하시는 사업마다 대박이 터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너무도 오랜만에 만져보는 인조 크리스마스 트리의 낯선 촉감 속에서 20년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추억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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