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가주의 FM 래디오 방송에서는 벌써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오고 있다. 머릿속‘체감 달력’으로는 아직 2004년의 중반이 되었을까 싶은데, 어느새 연말이다. 시간이 쏜살같이 달려가고 있다.
“1년은 하루보다 길다” 라는 명제는 맞는 것일까. 1년은 365일이고, 365일은 1일 보다 365배 길다. 그렇다면 이 명제는 진리일까. 정답은 ‘틀리다’이다. 1년이 하루보다 긴 것은 지구에서의 고정관념일 뿐이다.
수성을 예로 들면 전혀 이야기가 달라진다. 수성의 공전 주기, 즉 1년은 지구의 8일에 해당된다. 하지만 자전 주기, 즉 하루는 178일이나 된다. 따라서 수성에서는 하루가 1년보다 길다는 말이 된다. ‘고정관념’의 오류를 지적할 때 인용되는 예이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 수성까지 가지 않아도 하루가 1년 보다 길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하루는 지겹도록 안 가는데 1년은 훌쩍 지나가 버리는 기현상이다. 아침부터 밤중까지 동동거리며 바쁘게 움직이지 않으면 보낼 수 없는 것이 하루인데, 그런 하루들이 모인 한달, 1년은 거짓말처럼 빠르게 지나가 흔적도 없다.
삶의 페이스가 너무 빨라서 생기는 일이라고 본다. 분초를 다투는 빠른 템포의 삶에 끌려 다니다 보니 몸만 움직이고 마음은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버렸다. 손으로는 이 일을 하면서 머리로는 다른 일을 준비하느라 몸 따로 생각 따로 인 경우가 너무 많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순간은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이렇게 분주하게 사는 이유는 물론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이다. 더 잘 먹고 더 잘 살려면 돈이 더 필요하고, 돈을 더 많이 벌려면 일을 더 많이 해야하며, 일을 더 많이 하려면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서 첨단 산업이 발달하고, 경제가 성장할수록 시간 여유가 점점 더 없어지는 아이러니가 생겨나고 있다.
인디언들에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곰을 잡는 특이한 사냥법이 있다고 한다. 커다란 돌덩이에 꿀을 발라 밧줄에 묶어 나뭇가지에 매달아 두는 것이다.
그러면 지나가던 곰이 돌덩이를 달콤한 먹이인줄 알고 빨리 가질 욕심에 앞발로 후려친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돌덩이는 앞으로 밀려갔다 되돌아오면서 곰을 후려치고, 화가 난 곰은 더 세게 돌덩이를 때리고, 돌덩이는 그 반동으로 다시 더 세게 곰을 후려치기를 반복한다. 결국 된통 얻어맞은 곰은 나가떨어지고, 인디언들은 기절한 곰을 끌고 가면 된다는 것이다.
곰이 돌덩이의 진자운동에 말려들지 않고 가만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돌덩이가 그냥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빨로 밧줄을 끊어 돌덩이를 떨어트린 다음 꿀을 핥아먹었을 것이다.
‘꿀’을 더 빨리, 더 많이 먹고 싶은 욕심에 서둘다 보니 돌덩이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자기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맞는다.
곰의 ‘꿀’은 우리에게는 행복이 될까. 행복을 더 빨리, 더 많이 갖고 싶어 서둘다 보니 시간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소유는 느는데 행복을 느낄 여유가 없는 허깨비 인생이 되고 만다.
‘느림의 찬양’이라는 책을 쓴 칼 오노레라는 사람이 있다. 이 책은 지난 4월 출간된 후 12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특히 유럽에서 베스트 셀러라고 한다. 캐나다의 저널리스트였던 그도 얼마 전까지는 누구 못지 않은 ‘더 빨리, 더 빨리’의 산증인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지금 정반대로 느리게 사는 지혜를 퍼트리는 전도자로 변신한 것은 어느날 공항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비행기 시간을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고 있는데 한 광고가 눈길을 끌었다. 1분 짜리 베드타임 동화집이었다. 당시 2살이던 아들을 재울 때 정말 유용하겠구나 생각하던 그는 다음 순간 ‘내가 미쳤나’하며 정신이 들더라고 했다. 아들과 같이 하는 단 몇분을 줄이면서 까지 이룰 일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자각이었다.
삶은 숙제가 아니다. 어서 빨리 해치워버려야 할 대상이 아니라 매 순간을 경험하고 즐겨야할 축복이다. 11개월이 후닥닥 지나가 버린 지금, 연말 한달은 아주 천천히 느리게 살았으면 한다. 먹고, 마시고, 일하고,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는 매 순간에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함께 하는 삶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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