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미미했으나 이민 100년후의 결과는 풍성했다.
1903년 1월13일 갤릭호를 타고 인천항을 떠나 호놀룰루항에 첫 발을 디딘 102명의 한인 이민선조들의 밀알은 피와 땀과 눈물속에서 싹을 틔웠고 그 후손들은 이민101년이 지난 오늘 하와이 주류사회 곳곳에서 튼튼한 뿌리를 내리고 코리언 아메리칸의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다.
초기 이민1세와 2세의 애국은 가히 ‘전설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자그만치 300만달러를 조국의 독립자금으로 내놓았다.
당시 이들의 일당이 69센트에서 1달러선이었던점을 감안하면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액수이다. 하와이의 든든한 이민의 뿌리 저력은 100년이 지난 2003년 한인이민100주년 기념행사를 치루면서도 나타났다.
이민역사가 깊은 하와이 한인사회는 그 역사에 비해 경제적 뿌리는 튼튼하지 못했다.
이같은 이유에 대해 하와이 이민후손들은 초창기 이민선조들의 ‘사농공상’ 신분차별의 유교의식이 자녀들의 장래에 그대로 전달되었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하와이 한인이민후손들은 비즈니스 보다는 전문직 분야의 진출이 주류를 이룬다.
로스앤젤러스나 뉴욕등 한인사회의 경제력이 재벌급이라면 하와이 한인사회 경제력은 지방 소도시 중소기업에 비교된다고 할 수있다.
그러나 열악한 경제상황속에서도 하와이 한인사회는 2003년 한인 이민100주년기념사업 성공적 개최를 위해 1993년부터 준비를 시작했다.
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 김창원회장 및 가족들이 80만달러를 기부한데 이어 주정부와 시당국으로부터 32만달러 지원금을 받아냈고 이어 로컬 업체들과 한인동포들이 십시일반 한마음으로 3달러 모금운동을 전개하는등 하와이지역에서 이민100주년 기념사업을 위해 모금한 금액이 2백38만달러에 이른다.
세대간 벽을 허물고 한인사회가 한마음이 되어 치룬 이민100주년기념사업은 오늘날 하와이에 한국문화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무엇보다 하와이 주류사회속에서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표류하고 있던 초기 이민선조 후손들 2,3세들에게 한국인으로서의 자긍심과 뿌리의식을 심어주며 이들을 한인커뮤니티 울타리로 걸어오게 했다.
이민100주년기념사업의 ‘약발’은 1.5세, 2세들이 주축이 된 ‘하와이 한미재단’을 탄생케 했고 그들을 통해 예상보다 빨리 그리고 강력하게 하와이 곳곳에서 그 약효를 발휘하고 있다.
이민 102주년을 준비하는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민100주년기념사업회의 정신과 종잣돈을 물려받은 차세대 단체 하와이 한미재단(회장 피터 김)과 하와이주 한인회로 대표되는 이민1세대와 더불어 커뮤니티 노후대책 마련을 위해 ‘한인양로원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또다시 힘을 모으고 있다.
또한 대규모 한국축제를 4회째 개최하며 하와이 로컬사회와 하와이를 찾는 전세계 관광객들에게 한국의 문화를 알려갈 준비를 하고 있다..
하와이 주정부는 내년 1월13일을 ‘코리언 아메리칸데이’로 선포해 한인사회와 함께 이민 102주년을 축하한다.
이와 더불어 차세대 단체들은 초기 사탕수수농장에서 돌보는이 없이 숨져간 100여년전의 이민선조들의 묘역을 가꾸며 후손들에게 그리고 지역사회에 한인 이민200년 역사의 뿌리를 깊게 내려 가고 있다.
갤릭호가 한인 이민자들의 무리를 호놀룰루 항에 부려놓은 1903년 1월13일이후 1905년 7월에 이르는 기간동안 태평양의 험난한 뱃길로 오간 132편의 이민선들은 총 7천843명의 한인 노동 이민자들을 주섬인 오아후와 이웃섬인 빅 아일랜드, 마우이, 카우아이 등지에 풀어 놓았다. 1차 이민물결의 주역인 이들 7천여명은 흔히 초기 이민선조로 불린다.
초기 이민자들은 월15달러의 임금에 주당 6일 하루 10시간씩 사탕수수농장에서 3년간 근무해야 한다는 계약조건에 묶여 있었다.
하와이에 두 번째로 밀어닥친 2차 한인 이민물결의 주축은 ‘사진신부’들이다.
1910년부터 1924년까지 얼굴 한번 본적없는 사진속의 예비신랑, 혹은 가족을 뒤에 남겨둔채 고국을 등졌던 지아비와의 재결합을 위해 태평양을 건넌 사진신부의 수는 951명에 달했다. 7천여명 가운데 6천여명이 남성인 이민선조들이 미주 한인 이민사에 등장하는 ‘아담의 무리’ 였다면 사진신부들은 이들의 짝이 되어줄 ‘이브의 집단’이었다.
이곳 하와이에는 이민선조와 사진신부의 결합으로 탄생한 ‘시조 가정’이 4-5대째 명맥을 잇고 있다. 하와이 최고령 사진신부로 2002년에 타계한 유분조할머니와 초기 이민자인 유도번 할아버지가 일군 유씨일가의 경우 4대째 선손이 20대에 접어들었고 문대양주대법원장의 할아버지 문정헌씨가 사진신부를 아내로 맞아 탄생시킨 문씨가문은 5대까지 뿌리가 뻗어나갔다.
사진신부들 가운데 상당수는 젊은나이에 과부가 됐다. 나이를 속이고 결혼한 ‘중늙은이 신랑’들이 고된 노동을 이겨내지 못한채 속절없이 세상을 뜨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뒤에 남겨진 청상들중 다수가 현지인들과 재혼했는데 그 대표적 사례가 호놀룰루경찰국 리 도나휴전경찰국장의 어머니 이필덕여사이다.
<신수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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