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전 월요일 아침, 출근을 하니 책상 밑에 커다란 봉지가 놓여 있었다. 묵직한 꾸러미를 열어보니 오이지 한 병과 된장 한 병, 그리고 편지가 들어있었다.
“권정희씨 안녕하세요? 저 웨스트 LA에 사는 박용하예요”라고 낯익은 필체는 인사를 했다. 이따금씩 오피니언 난에 투고를 하고, 연초 오피니언 담당자들과 나누고 싶다며 된장을 몇 통 보냈던 바로 그 독자였다.
혹시라도 국물이 샐까봐 비닐봉지로 꽁꽁 묶은 오이지 병과 된장 병에는 ‘사랑표’라는 레이블과 함께, 언제 냉장고에 넣고 어떻게 보관하는 게 좋은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얼굴도 모르고, 말 한번 나눠본 적 없는 분에게서, 그것도 정성이 많이 들어간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솔직히 마음 편치가 않았다.
그런 마음을 미리 읽었을까, 그는 “(먹거리를 나누는) 대상은 특별히 없이 누구에게나 하지요.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하잖아요”라고 썼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50가구에 된장을 나누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나는 올해의 50명중 한 명으로 뽑힌 것이었다.
직장일 하는 주부들에게 먹거리 선물은 특별하다. 된장, 고추장, 김치, 오이지 등 두고 먹는 음식들을 직접 만들자니 시간이 없고, 그래서 사 먹자니 방부제·화학조미료 걱정에 항시 께름직하다. 누군가 손수 만들어주는 먹거리는 ‘시간’과 ‘걱정’을 동시에 해결해주는 반가운 선물이다.
그는 시간이 많은 주부는 아니다. 남편과 운영하는 세탁소에서 매주 70시간씩 일하면서 새벽잠을 쪼개 된장 등을 만든다고 했다. 이유는 두 가지이다. 사람들의 가슴이 너무 메말라 촉촉한 이슬을 뿌려주고 싶어서, 그리고 그렇게 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자기 욕심만 차리고 사는 것 같아서.
음식 나누기를 인류학자들은 진화의 차원에서 해석한다. 나눠먹는 습성이 우리의 유전자 속에 박혀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음식은 사람들이 가장 자연스럽게 나누는 품목이다. 단 돈 1달러도 남에게 거저 주지 않지만 음식은 함께 나눈다. 인류의 조상들이 사냥해서 얻은 고기를 다 같이 나눠 먹던 습관이 전해내려 온 것이라는 설명이다.
원시인들은 왜 애써 사냥한 고기를 혼자 먹지 않고 나눠먹었을까. 지금도 수렵·채집 생활을 하는 호주나 라틴 아메리카 등지의 원시 종족들을 대상으로 학자들이 연구를 했다. 결론은 나누는 것이 오히려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음식 나누기의 위험 절감 이론’이다.
사냥한 고기를 자기 가족끼리만 먹으면 어떻게 될까. 사냥에 실패한 날은 굶어야 하고, 성공한 날은 고기가 너무 많아 결국 썩혀 버리는 일이 생긴다.
그러니 오늘 내가 잡은 걸 이웃과 나누면, 장차 이웃이 잡은 걸 같이 얻어먹을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집단 차원에서 보면 고기의 공급량은 똑같은데, 개개인이 굶을 위험은 훨씬 낮아진다.
내 배만 채우는 대신 남의 배를 채워주면, 훗날 싱싱한 고기가 내 배로 돌아오는 진리를 인류는 일찌감치 터득했다.
나눠줌으로써 오히려 더 얻게 되는 신비는 나눠본 모든 사람의 체험이다. 박씨도 편지에 썼다. 지난 8년간 음식을 퍼 날랐으면 “제 주머니가 빌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풍요로워졌음은 왜일까요. 수학 공식으로는 풀 수 없는 것이 세상사인가 봐요”
메주 값, 오이 값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큰 은혜를 그는 받았다고 했다. 정신적·물질적 풍요, 가족의 화목, 그리고 잘 자라준 남매이다.
추수의 계절이다. 추수 감사절을 맞아 세 가지를 감사했으면 한다. 우선은 전쟁, 테러로 세계가 불안한 가운데도 온 가족이 지금 건강하게 잘 살고 있는 데 대한 감사이다. 아울러 지난 한해 사랑과 도움을 베풀어준 분들에 대한 감사가 있어야 하겠다.
다음은 ‘하늘에 쌓은 보화’에 대한 감사이다. 하늘의 창고에는 무엇이 쌓일까. 사람의 마음들, 내가 베푼 것에 대해 고마워하는 마음들이라고 본다. 나 한몸 사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마음까지 얻었다면 그 삶은 얼마나 감사한가.
하지만 먼저 짚어 보아야 하겠다. 올해 내가 거둔 ‘마음의 수확’은 얼마나 될까.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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