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숫가 별장
지난 주말 우리 가족은 산속 호숫가의 예쁜 별장에서 하루 반나절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다.
사실은 여름이 다 지나고 방학도 끝나가건만 휴가다운 휴가 한번을 다녀오지 못해 내심 툴툴거리던 중이었다. 비어있는 자기네 별장에서 푹 쉬다 오라는 한 친지의 호의는 마치 들썩이는 내 마음을 읽은 듯 하여 후닥닥 주말여행을 다녀오게 되었다.
샌버나디노 산 중턱에 자리잡은 ‘레이크 그레고리’(Lake Gregory)는 조용하고 아름다운 호숫가 마을로,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고즈넉하게 쉬기에는 최적의 휴양지였다.
특히 86에이커나 되는 드넓은 호수는 그 둘레를 완전히 한바퀴 돌며 산책할 수 있도록 트레일이 만들어져 있어 호수 구경하며 쉬엄쉬엄 걷기에 그만이었다.
관광지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조금 작아서 대단한 명소를 찾는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곳은 못 되지만, 번잡스럽지 않은 곳에서 쉬고 싶은 사람이라면 LA에서 1시간30분 인근에 그만한 곳도 드물 것이다.
호숫가 곳곳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있는 사람들과 오리떼를 볼 수 있었고, 비치에서는 많지 않은 사람들이 수영도 하고 보트와 수상자전거를 타며 한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쾌청한 날씨에 하늘과 호수가 얼마나 파랗던지, 공기는 또 얼마나 부서질 듯 맑고 깨끗하던지, 이런 곳에 세컨드 홈을 갖고 있는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남자들이 갖기를 열망하지만 일단 갖고 나면 귀찮아져서 곧 처분하고 싶어하는 세가지가 별장과 애인과 요트’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지만, 이곳에 별장을 갖고 있는 친지 부부는 평소 내가 무척 존경하는 분들이다.
은행 개인금고에 남들처럼 돈이나 보석 따위를 넣어두는 것이 아니라, 가족 사진의 필름을 넣어두고 있다는 분들이다. 집을 도둑맞거나 화재로 소실되는 일이 있으면 돈은 다시 모을 수가 있어도 없어진 가족 앨범은 찾을 수가 없기에 따로 필름만 보관해둔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 지혜가 삶의 모습이나 일터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이 부부는 한인타운에서 작지 않은 상점을 운영하고 있는데 나는 그렇게 수많은 물건들이 그렇게 한가지도 흐트러짐 없이 깨끗하게 정리되어 진열돼있는 스토어를 본 적이 없다.
매사에 빈틈없고 정확하며 남을 너무 배려하는 바람에 때론 나까지 조심스러워지지만 항상 경우 바르고 지혜로워서 가끔 만날 때마다 배울 점이 많아 감탄하곤 한다.
이번에도 내가 집 열쇠를 가지러가는 것조차 부담스러울까봐 우편으로 부쳐준 그 분은 열쇠와 함께 너무나도 자세하게 기록한 약도, 집안에 이미 갖춰져 있는 것들과 방문자가 가져가야할 것들의 목록, 거기에 덧붙여 떠나기 전날 팩스로 이런 주의사항을 보내왔다.
“숙희씨, 떠나시기 전에 몇가지 더 생각났어요. 1) 부엌의 개수대에 있는 수도꼭지중 왼쪽의 더운물 꼭지는 한참 돌려야 더운물이 나옵니다. 2) 낚시나 산책은 호수를 내려다봤을 때 왼쪽으로 돌아서 시계방향으로 시작하시는 것이 훨씬 좋습니다. 3) 물놀이 공원 입장료는 일인당 3달러이니까 아예 돈을 가지고 내려가세요. 4) 드라이브 웨이의 커브가 경사져서 차 밑이 높지 않은 차는 다칩니다. 조심하시길. 5) TV 채널이 없으니까 꼭 재미있는 DVD 테입을 가져가세요”
여기까지만 해도 질리는데 막상 가보니 가족, 친지가 이따금 방문할 뿐인 별장을 얼마나 깨끗하고 쾌적하게 꾸며놓았는지, 사용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이층에 있는 3개 베드룸을 모두 공주방처럼 꾸며놓았고 욕실에는 일체의 세면도구가 갖춰져 있으며 부엌에는 전기밥솥과 식기류는 물론 햇반과 김, 라면, 커피 등의 기본적인 인스턴트 식품들이 마련돼있고 냉장고 안에 된장, 고추장, 보리쌀, 멸치까지 들어있었다.
그 호숫가 별장에서 우리는 밥도 지어먹고, 동네 식당에 가서 식사도 하고, 호숫가를 산책하고 드라이브도 했으며, 볼링장에서 볼링도 치고, 밤에는 빌려간 DVD로 영화도 보면서 오랜만에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따지고 보면 거기서 한 일들은 모두 여기서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우리는 마치 여행을 떠나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 양 특별한 기분이 되었던, 좋은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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