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연휴 때 교인들 몇 사람이 둘러앉아 얘기를 나누던 중 건망증 얘기가 나왔다. 별별 경험담이 다 쏟아져 나와 연이어 폭소가 터지고 ‘야-위로가 되네.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먼.’ 하면서 서로 위로를 주고받는다. 나보다 더 심한 분도 있어 정말 위로를 받았다.
나도 잊음이 심해서 꼭 가지고 가야 할 물건이든지 남에게 전해 주어야 할 중요한 물건이 있을 때는 신고 갈 신발 바로 앞이나 옆에 미리 갖다 놓아야 틀림없이 챙겨갈 수가 있으므로 생각 날 때는 며칠 전이라도 현관 앞 신발 옆에 아예 갖다 놓는다. 며칠이 남아있으니 그때 챙겨야지 했다간 번번이 잊어버리기 일쑤여서.
그런데 H 장로님은 나보다 더 심하다. 한번은 누구에게 꼭 전해 주어야 할 물건을 샤핑백에 넣어 신발 옆에 얌전히 놓고는 안심하고 잠을 잘 잤단다. 이튿날 급히 일어나 나가면서 웬 샤핑백? 신발 옆에 있는 것을 보고는 ‘아니, 누가 쓰레기 백을 여기다 놨어?’ 툴툴거리며 쓰레기통에 냅다 던져버리고는 부랴부랴 집을 나섰단다. 그 다음의 스토리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겠다.
그 외에 안경을 쓰고도 안경을 찾느라 온 방을 헤맨 이야기며 금방 펜을 집어들고도 펜을 찾느라 애쓴 이야기며 속치마를 입어놓고도 속치마 찾느라 한참 시간 걸린 이야기며 차에서 가방을 들고 내렸으면서도 한 손에 같이 들고 있던 옷에 가려 가방이 보이지 않으니 가방이 없어졌다고 난리를 피워 10년 감수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웃음도 계속 이어지고.
우리 부부는 둘 다 건망증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편이라 이 건망증 때문에 일어나는 해프닝이 부지기수고 그에 따르는 에피소드도 많아 배꼽 잡을 일이 심심찮게 일어난다. 그중 남편에게 가끔 일어나는 일은 모임이 있을 때마다 늘 나와 같이 가는 것은 아니므로 그 모임에 혼자 갔는지 나와 함께 갔는지 정확히 기억을 못하는 거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바로 어제 어떤 모임에서 남편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식사를 같이 나누며 들었던 이야기를 오늘 나에게 신나게 들려준다. 그래서 “여보, 그 얘기 어제 나랑 같이 들었잖아요” 하면 “어? 당신도 어제 거기 같이 있었단 말이요? 허허.”
나이가 들수록 심해지는 건망증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득을 볼 때가 많다. 특히 이 건망증이 우리 부부 사이를 무풍지대로 만들어주는데 왜냐하면 좋은 일들은 기억하려고 노력하고 안 좋았던 일들은 서로 잊어버리려 노력하는 데다 건망증까지 맞물려 잘 잊어버림으로 속상하다고 꽁해 있을 일도, 싸울 일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건망증은 누구에게나 권장해 볼 만하다. 적어도 부부 사이의 건망증은 발전시킬수록 좋지 않겠나 싶다. 대인관계에 있어서도 기름친 듯 매끄러워 진다. 이를 일컬어 ‘좋은 건망증’이라 해도 좋고 문자를 써서 ‘선택적 건망증’이라 해도 좋겠다.
뒤엣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앞만 보고 달리기로 작정한 부부는 항상 행복할 수가 있다. 또한 중요한 일들은 잘 기억하되(예를 들어 하나님의 말씀이라든지 남에게 은혜를 입은 일이라든지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라든지), 하찮은 일들은(원망스러웠던 일들, 섭섭했던 일들, 화났던 일들, 억울했던 일들, 걱정스러운 일 따위) 건망증에 맡겨버리는 게 참 지혜로울 것 같다.
남편은 건망증 운운해 가면서도 해야 할 일은 다 잘 감당하고 있으니 참 신기하고 감사할 일이다. 편에게 ‘천재적인 건망증’이라는 게 있는데 이것에는 나도 동의한다. 남편의 이론에 의하면 천재란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고 나머지는 다 잊어버리므로 그 한가지로 성공해서 천재 소리를 듣는다.
자기도 천재임이 분명한 것이 다 잊어버려도 한 가지만은 꼭 기억하는 게 있는데 그건 자기에게 아내가 틀림없이 단 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란다.
건망증 얘기가 끝없이 오가다 드디어 남편이 마지막 말로 히트를 쳤다. “그런데 말이지, 그 아내라는 여인이 매일 처음 보는 새 얼굴이야.”
덕분에 우리 부부는 ‘권태’라는 걸 모르고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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