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을 맞이해서 오랜만에 버지니아주의 집을 찾았다. 학생일 때보다 오히려 학교에서 가르치는 입장일 때 방학이 훨씬 더 반갑고 기쁜 걸 이제야 알았다. 그래서 예전에 방학을 알리는 선생들의 표정이 그렇게 상기되어 있었나보다.
집에서 1주일 가량 보낸 후, 2박3일 동안 캐나다 토론토에 사는 친구를 방문했다. 그 친구와는 28년 전, 초등학교 시절에 처음 만나서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고, 내가 미국으로 이민 온 후에도 꾸준히 서로 연락을 취해왔다. 몇년에 한번씩 한국을 방문할 때 가장 먼저 만나보던 친구였는데, 2년 전에 초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된 아들을 위해 토론토에 와서 살고 있다. 98년 겨울에 내가 서울을 방문했을 때 일산에 살고 있던 그 친구 집에서 하루 자고 온 일이 있었는데 그 이후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 때 아직 아기같던 그 친구의 아들이 벌써 9살이 되어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항상 밝고 씩씩하던 모습의 그 친구는, 공기좋고 물좋고 환경좋은 캐나다에서 열심히 운동을 하며 살고 있어서인지 보던 중 가장 건강하고 밝은 모습으로 공항에 마중나왔다. 짧게 잘라서 파마한 머리와 운동복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그 친구의 모습이 왠지 나를 주눅들게 했다. 그래서일까. 주차장으로 걸어가면서 연신 반갑다며 내 손을 잡고 팔짱을 끼는 그 친구의 손을 불편해하며 슬그머니 밀어내던 내 모습이 지금 생각하니 몹시 촌스럽게 느껴진다. 얼마 전 감기를 심하게 앓았다는 친구는 볼 살이 홀쭉해져 있었지만, 활짝 웃는 모습과 커다란 주먹코가 예전과 하나도 변하지 않아서 금새 안심이 되었다.
미술을 전공한 친구는 학교 선배와 결혼을 하였는데, 전에 언젠가 나와 전화로 대화를 하던 중, 자신이 평생 한 일 중에 가장 잘했다고 생각되는 일이 바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결혼한 것이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한국에서 남편의 사업이 아직 정리되지 않아서 1년에 너댓번밖에 못 만나고 떨어져 살고 있지만, 그 친구 특유의 에너지와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여전히 씩씩하게 생활하고 있는 듯 했다.
집안에는 아들이 그린 그림들과 남편이 그린 그림들, 그리고 행복해 보이는 가족사진들로 온통 도배되어 있었다. 부엌 카운터탑 위에는 남편이 그림을 곁들여서 짧은 메시지를 적고 유약을 발라서 구워낸 타일들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예쁜 그림들과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메시지들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결혼한지 10년이 넘었으면서도, 결혼 생활이 너무 좋다면서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짓는 친구의 모습이 예뻐 보였다.
2박3일은 생각보다 무척 짧은 시간이었다. 서로 식구들의 안부를 물은 것 외에는 우리가 나눈 대화가 잘 생각이 안 나지만, 우리는 같이 있는 동안 쉬지 않고 수다를 떨었다. 토요일 아침에 만나서 월요일 저녁에 헤어질 때까지, 친구가 해 주는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내가 만든 스파게티를 함께 먹기도 하고, 같이 장을 보기도 하고, 비디오를 빌려서 보기도 하고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도착한 날 저녁에는 친구의 아들을 옆집에 맡기고 토론토의 Little Italy 에 가서 저녁 식사를 했다. 토론토에 온지 2년이나 됐지만, 처음으로 Little Italy 에 가본다는 친구와 마음에 드는 식당에 앉아서 이런 저런 수다를 떨며 여유롭게 저녁 식사를 했다.
다음 날은, 셋이서 차이나타운에서 딤섬을 먹은 후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야구 경기를 관람했다. 엄마가 새로 사 준 파란 모자를 쓰고 자리에 앉아서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친구 아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왠지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느껴졌다.
아무 말을 안 해도 불편하지 않고, 어떤 주제로 얘기를 해도 대화가 되고, 서로 많은 설명이 필요 없고, 같은 기억과 같은 상식을 공유하고 있다는 게 그렇게 편한건지 이번에 새삼 깨달았다. 무엇보다 나를 감추거나 포장하지 않고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대화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친구를 통해서 반영되는 나의 어렸을 적 모습들을 간간이 발견할 수 있는 점도 매우 행복했고, 그 친구와 내가 살아오면서 경험했던 여러가지 사건들 속에서 서로의 모습을 재발견하는 것도 유쾌했다. 2년 후면 우리가 친해진지 30년이 된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그 어린 나이에 이렇게 좋은 친구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고, 계속 서로에게 친구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도 얼마나 큰 행운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번 휴가는 내게 있어서 여러모로 마음이 따스해지는 시간들이다.
새라 최<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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