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눈물로 일군 영광... 첫 뇌성마비 한인박사 정유선씨
지난 15일 훼어팩스에 있는 조지 메이슨 대학에서 뇌성마비 장애인 정유선(34)씨의 박사 학위식이 거행됐다.
이날 외동딸 유선씨가 박사학위를 받는 모습을 지켜보며 말없이 눈물짓던 김희선씨에게는 이 모든 게 꿈만 같고 기적 같았다.
60년대부터 70년대 초까지 이미자씨와 대중의 인기를 나누어 누렸던 여성보컬그룹 ‘이 시스터즈’의 멤버였던 어머니 김씨의 가슴에 맺힌 사연들은 한 둘이 아니다.
외동딸 유선씨는 70년 4월, 생후 9일 만에 황달 증세를 보였고 두 돌이 지나도록 걷지를 못했다. 찾아간 병원에서는 한결 같이 발육이 늦을 뿐이라는 진단만 되풀이했다.
유선씨 생후 2년 4개월 되었을 때야 정확한 병명이 밝혀졌다.
신생아 황달로 인한 뇌성마비.
청천벽력 같은 진단에 어머니는 13년간의 가수 생활을 영원히 접었다.
곧이어 병원에서는 연세재활원에 입원시키라고 권유했다.
사지가 뒤틀리고 일그러진 얼굴에 침을 흘리고 있는 중증 환자들을 보니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더구나 주중 내내 재활원에서 만의 격리 생활이 강요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데리고 갔다 다시 오기를 몇번 반복하다 결국 유선씨를 재활원에 입원시켰다.
유선씨는 재활원에서 물리치료를 통해 걷기를 배우고 언어교정을 통해 말하는 것을 배웠다.
뒤틀린 사지 . 일그러진 얼굴
의지로 극복...특수 보조 공학 전공
9년전 결혼한 “행복한 엄마”
2년간 토요일에 집에 데려와 월요일 아침에 재활원에 보내는 일을 부친 정현화씨는 한번도 빠뜨리지 않았다.
아직 걷기가 서툴고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초등학교에 정상아들과 나란히 입학했다.
그런데 입학 첫날 아이들이 자기 소개를 하며 노래하는 시간에 유선씨는 주저하지 않고 손을 번쩍 들었다. 이를 지켜본 어머니는 가슴이 철렁했다.
유선씨는 찡그린 얼굴과 일그러진 입과 아무도 알아듣기 힘든 말로 자신을 소개하고 동요까지 열심히 불렀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짓궂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유선씨는 끝까지 노래를 부르고 난 뒤에야 제자리에 돌아와 울음보를 터뜨렸다.
이를 지켜보던 어머니 김씨는 교실 바깥으로 뛰쳐나가 학교 뒤뜰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그러나 유선씨의 공부는 일반학생에게 뒤지지 않았다.
상명여중에 진학한 유선씨는 배치고사에서 826명 가운데 2등을 했을 정도. 명성여고에 다닐 때에도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매사 활동적이고 적극적이었지만 일부 친구의 놀림과 질시로 힘들 때가 적지 않았을터.
그럴 때마다 일기장을 친구 삼아 속마음을 털어놓곤 했다.
그 당시 딸의 일기를 한번 훔쳐보았다고 어머니 김씨는 이제서야 고백한다.
눈에 들어온 대목은 “내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더 좋지 않았을까”로 어머니의 가슴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그 일을 회상하면서 어머니 김씨는 또다시 눈물을 터뜨리자 딸 유선씨도 “정말 몰랐다”며 엉엉 목놓아 울었다.
대학연합고사 성적도 좋아 이화여대에 원서를 집어넣고 면접까지 보았지만 결과는 낙방.
단지 장애자라는 이유로 떨어진 것 같아 어머니는 다시 가슴이 메어지는 아픔을 느껴야 했다.
아버지는 유선씨에게 미국 유학을 권유했다.
이를 쾌히 응낙한 유선씨가 막상 미국으로 떠나는 날에 아버지는 유선씨 이름을 크게 두어 번 부르며 굵은 눈물을 흘렸다.
89년에 혼자 유학길을 떠난 유선씨는 이모가 있는 버지니아로 와서 정식 유학생활을 시작했다.
학부는 조지 메이슨대학에서 석사과정은 코넬대에서 컴퓨터 공학을 전공했다. 박사과정은 조지 메이슨대학으로 돌아와 특수교육으로 전공을 바꿔 특수보조공학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그 사이 유선씨는 남편 장석화씨를 만나 결혼을 하고 어린 자식을 둘이나 둔 주부가 됐다.
“애들을 재워놓고 새벽 3-4시까지 공부할 때가 많았어요.” 주부로써 힘들게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 본 남편 장씨의 말이다.
낮에는 대학 부속 ‘헬렌 켈러 연구소‘에서 보조공학 전문가로서 근무하며 전액 장학금과 일부 생활비도 보조받았다.
그의 열심에 지도교수들은 작년에 이어 올해도 ‘올해의 대학원생’으로 유선씨를 선정했다.
그런 와중에도 유선씨는 국내 뇌성마비 장애자들에 대한 관심을 항상 유지해왔다.
99년도에 한국뇌성마비복지회의 웹사이트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본인이 직접 공을 들여 웹사이트(www.kscp.net)를 제작, 운영해 왔다.
또한 국립특수교육원이 발간하는 ‘현장 특수교육’에는 재작년 부터 꾸준히 투고해오고 있다.
유선씨의 박사논문은 ‘장애인의 언어소통을 위한 보조기구에 대한 사용자들의 시각’을 주제로 음성합성(text-to-speech) 기기를 사용하는 장애자들의 입장 및 요구사항을 체계화한 것.
유선씨가 한국인 뇌성마비 장애자 박사 1호가 되자, 국내언론은 이에 대한 낭보를 일제히 다루었다.
이제 유선씨는 국내장애인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주는 상징적 존재가 됐다.
부모님 못지 않게 유선씨에게 힘을 대준 이는 바로 남편 장석화씨.
“처음부터 한결같이 옆에서 묵묵히 지켜주고 사랑해주었어요.” 유선씨의 말에는 남편에 대한 고마움이 깊이 배어 있다.
남편과의 첫 만남은 93년 할아버지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친구의 할머니를 위로 방문하면서 이루어졌다. 친구의 사촌오빠가 지금의 남편 장씨 였다.
당시 유선씨가 할머니의 두 손을 꼭 잡고 진정으로 위문하는 모습이 가슴에 와 닿았다고 장씨는 고백한다.
남편이 호감을 먼저 표시한 후에야 유선씨도 자연스럽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95년 봄에 결혼식을 했으나 유선씨가 뉴욕주에 있는 코넬대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으면서 1년 반 정도 헤어져 살아야 했다.
그 동안에 남편은 한 달에 두어 번씩 큰 아이스박스에 한국 음식을 잔뜩 넣어 유선씨에게 날랐다. 이들 사이에 태어난 사랑의 결실이 아들 하빈(6세)와 딸 예빈(2세).
유선씨는 어릴 적부터 아빠와 함께 나누어온 꿈이 있다.
장애인들의 위한 재활원을 예쁘게 지어서 이들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 아버지 정연화씨는 수위가 되겠다고 자원했단다.
그러나 예상치 않게 미국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새로운 꿈을 가지게 됐다.
어머니와 아내로서의 자리는 그대로 지키면서도 다른 장애인들의 앞길을 밝히는 학문을 계속 추구하는 것이 바로 그것.
조교수 임용 과정에 있는 유선씨는 이번 여름학기에 모교에서 ‘보조공학과 인터넷’이라는 클래스를 가르친다.
“앞으로는 남을 위한 공부, 남에게 베푸는 학문을 계속하면서 기회가 닿으면 한국에서도 봉사하고 싶어요.”
<권영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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