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형부 20주기
지난 5월7일은 둘째 형부가 돌아가신 지 꼭 20년이 되는 날이었다.
언제나 이맘 때, 보라색 자카란다가 거리마다 화사하게 피어나는 봄날이면 나는 1984년 이날 37세의 젊은 나이로 어린 두 딸과 사랑하는 아내를 두고 눈을 감은 형부를 생각한다.
검은 뿔테 안경, 소년같이 맑은 눈, 마르고 큰 키에 꾸부정한 어깨, 언제나 손가락 사이에 끼어있던 담배… 폐암으로 먼저 가신 고 유현수님은 당시 한국일보 사회면에 매일 ‘태평양’이란 시사칼럼을 게재하던 논설위원이었다. 70~80년대 이민 온 사람들은 그 무렵 교과서처럼 읽혔던 ‘KAL 타고 왔습니다’란 책을 기억할 것이다. 그 책의 저자가 바로 우리 형부였다.
스물다섯 처녀였던 내 눈에 형부보다 괜찮은 남자는 이 세상에 없었다. 너무나 똑똑하고, 사리판단이 정확하며, 날카로운 명필이었던 언론인, 게다가 성격이 좋아서 주위에 언제나 친구들이 들끓었고, 언니가 늘 ‘존경한다’고 말했던 좋은 남편이었으며, 아이들 교육에 유난히 신경 쓰던 좋은 아버지였다. 형부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지금껏 형부 이야기가 나오면 안타까워하는 것이 단지 고인에 대한 예의 차원만은 아니라고 확신한다.
언니와 형부는 연세대학교 캠퍼스 커플로 연애하여 결혼하였는데 내가 국민학교 시절부터 우리 집에 드나드셨기 때문에 거리감이 없었다. 내가 언니 초청으로 이민 와서 10년만에 처음 만났을 때 형부는 한가지 다짐을 하셨다.
“너 시집 갈 때까진 까불지 말고 여기 있어라. 그리고 이 집에 있는 동안은 반드시 이 지붕 밑에서 잠을 자도록 해라” 그 말씀대로 나는 결혼 전날까지 언니 집에서 살았다.
생각해보면 내 눈에 그렇게 멋있고 성숙한 어른이었던 형부가 지금의 나보다 거의 10년이나 젊은 나이였던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의 상대성 때문일까, 아니면 형부라는 사람이 워낙 출중했던 탓일까. 30대중후반 시절의 나를 돌이켜보아도 그렇고, 지금 그 또래 후배들을 보아도 그처럼은 성숙하게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형부는 영원한 어른으로 내 머리에 각인되어 있다.
골프광이었고 누구보다 건강했던 형부는 83년 연말에 점심식사도중 쓰러졌다. 병원에 실려가 검사해보니 뇌에서 혹이 발견되었고, 뇌종양 제거 수술을 하고 보니 그것이 암이었다. 좀더 정밀검사를 했더니 폐암이 번져서 뇌로 올라간 것이었으며, 폐암은 이미 손 쓸 수 없을 만큼 퍼져있었다. 형부는 하루 담배를 두갑씩 피우던 유명한 골초였던 것이다.
처음 쓰러진 날로부터 4개월 10일만에 형부는 세인트 빈센트 병원에서 숨을 거두셨다. 그때 딸들이 열살, 열한살, 언니는 서른 여섯이었다. 요즘은 젊은 사람들도 암에 걸리는 일이 가끔 있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고도 청천벽력같은 케이스여서 타운에 한동안 화제가 되었었다.
생활력이 강한 언니는 그 후 할리웃에서 가발가게를 운영하면서 재혼은커녕 연애도 한번 안 하고 두 딸을 훌륭하게 키웠다. 약사가 된 큰 딸 클레미가 벌써 서른한살, NBC -TV의 뉴스제작부에서 일하는 작은 딸 크리스틴이 서른살이다.
올해 20주기를 어떻게 치를까 생각하다가 우리는 그냥 가족끼리 추모예배를 갖기로 하였다. 10주기 때까지는 형부 친구들과 일가 친지를 초대해 추모식을 가졌었지만 이제는 너무 세월이 흘렀으니 잊혀진 사람을 다시 불러내지 말자고 언니가 만류하였다.
언니와 두딸, 우리 가족, 동생네 가족이 참석하여 형부가 좋아하셨던 찬송을 부르고 성경을 읽고 형부에 대해 추억하는 시간을 가졌다. 언니는 의외로 차분했는데 두 딸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철 들고 나서 아빠 이야기를 하며 그렇게 우는 조카들을 처음 보았다.
특히 아빠와 많이 싸우고 부딪쳤던 둘째 크리스틴은 주체하지 못하고 눈물을 쏟으며 아빠를 그리워하였다. 특히 아빠라는 한 사람을 어린 눈으로 본 것밖에는 알지 못함을, 아빠라는 한 인간의 진면모를 지금의 자신이 알아낼 수 없음을 아쉬워했다.
두 조카는 공통적으로 자신들의 오늘이 있게 해준 엄마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감사, 그리고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빠가 심어준 도전정신을 이야기했다.
사람은 가도 아주 가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살과 피와 정신과 영혼이 두 딸들에게 이어져 살아가는 것을 본다. 그렇게 딸들 속에 살아있는 아빠는 훗날 그 자녀들에게로 이어져 또다시 살아갈 것이다.
20년이란 오랜 세월 혼자서 외로움과 싸우며 꿋꿋하게 살아온 언니에게 박수와 갈채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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