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은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주는 명상의 시간
지경희
LA고교 카운슬러
개학(연중 수업제의 경우 3월 초)을 얼마 앞두고 그냥 출근하기는 못내 아쉬움이 자리해서 그래도 어딘가에 확실한 도장이라도 찍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무감과 이번 방학엔 어디 안 가세요?라며 받는 인사가 좀 불편하기도 해서 어딜 가긴 가야지 하는 맘이었다.
막상 가려고 생각하니 예전처럼 설렘보다는 옆에서 안 가냐는 인사에 떠밀려서 가는 모양새가 영 찜찜하긴 했다. 마침 호주에 사는 어릴 적 친구와 전화 통화를 하다가 그 날로 행선지를 호주로 정하고 준비도 없이 몇 권의 책만을 달랑 넣어 10일 일정으로 호주를 다녀왔다.
호주는 이번이 두 번째로 처음에 갔을 때는 호주의 각 도시를 버스와 기차를 타고 곳곳에 다니며 배낭여행을 했던 터라 이번엔 그냥 친구 집에 머물며 말 그대로 쉼을 얻고 싶었다. 그곳은 여름이어서 섭씨 40도가 웃도는 한국의 후텁지근한 여름 날씨였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란 말처럼 그 곳에 막상 가보니 친구의 친정 조카 중 큰조카는 이미 유학 와서 호주 대학 진학 중 군복무 하느라 한국에 가있었고 둘째 조카가 한국에서 유학 와 있었다. 친구는 7년 동안 친정 언니의 자녀들을 돌보고 있었으며 그래도 자긴 언니와 사이가 좋은 편이란다. 그나마 서로 생활에 간섭을 안 해야 좋은 이모로 남는다며 조카에 관해서는 밤에 늦게 들어오든 학교에 지각을 하든 일절 관심 밖이다.
친척과 어설픈 관계를 가지며 아이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를 그렇게 관심 가져 주는 어른도 없이 자란다는 것이 못내 찜찜하기만 했다. 부족함이 없이 자란 아이들, 미래에 대한 불안감보다는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그저 적당히 피해 가는 아이들을 보며 어느 나라에 살든 자식 걱정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게 어찌 호주뿐이랴, 이 곳에서도 내내 듣는 소린 걸.
아무리 모르는 척하며 사는 게 피차에 싫은 소리 듣는 것보다 낫다 하지만 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주며 서로의 삶을 존중하며 사는 것이 그 얼마나 어려운 일이기에 무관심하며 사는 게 상책인 듯 서로의 책임을 회피하는지.
친구는 아들 하나를 두었다. 사업을 하면서 아이를 학교에서 픽업해서 애프터 스쿨에 보낸다. 태권도, 클라리넷, 주산 학원, 수학 과외, 그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아이가 학교를 마치면 즉시로 그 다음 스케줄에 맞춰 기계처럼 움직이니 아이는 목멘 소리를 한다. 이제 겨우 12세인데 좀 더 커서 사춘기라도 되어 안가겠다고 우기면 어떻게 할건지 지레 걱정스럽기만 하다. 모두가 사는 모양새는 미국이건 호주건 한국이건 비슷하다.
오랜만에 친구와 만나서 호주산 노블 와인을 마시고 호주의 유명하다는 해산물을 먹으며 나는 매일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줬다. 자식 이야기며, 남편 이야기, 조카를 키우며 속상했던 이야기를 매일 매일 재탕 삼탕해 가며 풍선 불듯 터지면 또 불고 그렇게 며칠을 이야기했다.
친구의 조카와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주에서의 새로운 가족과 하루에 눈 한번도 마주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일이며 서로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우면서도 모르는 척 멀리하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삶인지를 이야기했다.
친구와 친구 조카에게 오기 전 긴 장문의 편지를 썼다. 내가 그들을 마주하면서 나의 일상의 편의를 위해 그 곳에 갔다가 가보지 않은 새로운 길을 경험하게 되어 고마웠노라고. 그리고 그 길은 사람 사는 냄새가 풍기는 천국이었노라고 고백했다.
그냥 오늘 하루 착하게 살자. 마주하는 손님에게, 이웃에게, 가족에게 시간을 미루지 말고, 탓하지 말고 따뜻한 미소를 주며 넉넉한 마음으로 긴 숨을 고르며 살자. 굳이 여행이랄 것도 없다. 난 그저 내 일상을 벗어나 또 다른 삶을 경험했을 뿐이다. 그런 복잡한 삶 속에 뛰어든 것이 내겐 쉼이었고 휴식이었다. 휴가 중 읽겠다고 사간 책은 고작 비행기에서 읽었을 뿐이다. 친구의 일상의 삶이 곧 내겐 교과서였고 무거운 내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해준 명상의 시간이었다.
이제 개학을 하면 또 다른 삶의 형태를 따라 마주하게 될 내 모습을 걱정하진 않는다. 그저 내 몸이 가는 그 곳에 내 마음도 내려놓을 준비를 했으니까. 이렇게 여행은 이유가 어떻든 남는 장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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