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온갖 사치와 허영을 전시하는 듯한 오스카 쇼를 보는 진짜 스릴은 일부 시상자와 수상자의 정치성 발언을 듣는데 있다. 지난해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직후 열린 오스카 시상식에서 ‘컬럼바인에서의 볼링’으로 장편 기록영화상을 받은 마이클 모어가 무대에 올라가자마자 부시를 사납게 비판하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모어는 기자실에 와서도 성이 안차다는 듯 씩씩거리며 부시를 마구 헐뜯었 었다.
오스카 시상자나 수상자의 정치성 발언의 역사는 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3년 ‘대부’로 주연상을 받은 말론 브랜도는 자기 대신 아메리칸 인디언 사친 리틀페더를 참석시켜 자신은 할리웃의 아메리칸 인디언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기 위해 시상식에 불참한다고 대변시켰었다. 이보다 두 해전 ‘패튼’으로 역시 주연상을 탄 조지 C. 스캇이 오스카 쇼를 ‘고깃덩어리들의 퍼레이드’라며 보이콧하고 아예 상 받기를 거절한 것도 일종의 정치적 제스처라 하겠다.
열렬한 반체제 사회운동가였던 제인 폰다는 ‘클루트’로 주연상을 받은 1972년 월맹을 방문, 대공포 앞에서 사진을 찍어 ‘하노이 제인’이라는 별명을 얻은 바 있다. 1975년 반전 기록영화 ‘가슴과 마음’으로 오스카상을 받은 피터 데이비스와 버트 슈나이더는 월맹 지도자가 보낸 ‘우정의 인사말’을 읽어 장내를 아연케 만들었었다. 이들이 무대 밖으로 나간 뒤 사회를 보던 프랭크 시나트라는 “오늘 밤 이 프로에서 나온 어떤 정치적 언급에 대해서도 우리는 책임이 없으며 그런 말이 나온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토를 달았었다.
오스카 쇼의 정치성 발언 중 가장 센세이셔널 했던 것은 바네사 레드그레이브의 수상 소감. 영국 배우로 극좌파인 그녀는 열렬한 베트남전 반대자요 에이레 공화군(IRA) 및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지지자였다. 레드 그레이브는 1978년 ‘줄리아’로 조연상을 받았는데 수상 소감에서 “너희들 시온주의자들아”라며 유대인들을 맹공, 장내가 발칵 뒤집혀 졌었다. 그런 여자가 1980년 TV 드라마 ‘시간을 위한 연주’에서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실제 인물역을 맡아 또 한번 유대인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 었다.
상은 못 탔지만 2년 계속 시상자로 무대에 올라 정치성 발언을 해 논란이 됐던 배우가 리처드 기어. 기어는 70년대 중반 불교신자가 되었고 1978년 네팔의 티베트 난민 수용소를 방문한 뒤 달라이 라마의 제자가 된 정치적·종교적 활동가다. 기어는 1991년 오스카 시상식에서 AIDS에 대한 미국인들의 깊은 관심을 촉구했고 이듬해에는 티베트의 독립을 전세계에 호소했었다. 이 사건(?) 이후 아카데미측은 오스카 시상자나 수상자들에게 정치적 발언을 자제해 달라고 당부한 바 있다.
지난 달 29일에 열린 제76회 오스카 시상식에서도 역시 수상자들의 정치적 발언이 눈길을 끌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정치적 발언을 한 사람이 ‘전쟁의 안개’로 장편 기록영화상을 받은 감독 에롤 모리스(사진). 이 영화는 베트남전의 주 고안자인 로버트 맥나마라 전 미국방장관을 인터뷰한 것으로 맥나마라의 뒤늦은 참회록.
모리스는 수상 소감에서 “미국이 다시 전쟁과 죽음의 토끼 굴로 내려가고 있다”면서 “사람들이 이 영화에서 제기된 아이디어와 문제에 관해 생각하고 반성할 수만 있다면 나는 썩 괜찮은 일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기자실에 나타나 “우리의 외교정책은 흉악하고 섬뜩한 것”이라며 “이 영화가 사람들로 하여금 현재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에 대해 논쟁하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이상 기쁨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동거녀이자 배우인 수전 서랜든과 함께 반체제 스타 커플로 잘 알려진 조연상 수상자 팀 로빈스(‘미스틱 리버’)는 “이번 선거에서 부시 정부가 다시 더러운 책략으로 선거를 훔칠 가능성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누군가 이번 선거가 공정하게 치러지도록 보장해야 한다”면서 “민주주의에서 최초로 재검토를 할 수 없는 컴퓨터 선거에 진짜로 신경이 쓰인다”고 답했다. 한편 역시 반체제 측인 주연상 수상자 션 펜(‘미스틱 리버’)은 수상 소감을 통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없다는 것 외에 배우들이 아는 것은 연기에 최고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이라고 부시의 거짓말을 힐난했다.
전세계 10억인구가 시청하는 오스카 쇼보다 더 큰 정견 발표장도 없다. 내년에는 또 어느 배우가 이 자리에서 정치성 발언을 할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박흥진<편집위원>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