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카펫 위에서>
지난 주말 우리 편집국에 카펫을 새로 까는 대공사가 있었다.
원래 살면서 카펫을 갈거나 페인트 하는 일은 이사보다 더 힘든 법이다. 드넓은 편집국, 거의 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살림살이를 일시에 옮겼다가 다시 다 들여놓는 일이 장난이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각자 짐 정리 차원의 버리기를 시작해 금요일 이른 오후부터는 거의 모든 부서가 업무를 폐한 채 짐 싸고 책상 나르는 일로 북새통을 이뤘다.
토요일 하루종일 카펫공사가 있었고 일요일 오후 또다시 모두 나와서 새 카펫 위로 책상과 비품들을 옮겼으며 컴퓨터와 전화선을 다시 연결하느라 다들 ‘노가다’를 뛰었다. 몬지, 몬지, 휴~~
집을 이사할 때에야 버릴거 버리고 대청소를 한번 하게 되듯, 직장도 마찬가지다. 사무실은 비품이 훨씬 적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 얼마나 많은 자료들과 살림살이가 서랍마다 꽉꽉 들어차 있는지, ‘자료’의 동의어가 ‘쓰레기’라는 것을 이번에 알게 되었다. 더구나 나같이 신문사에서 청춘을 불사른 사람은 그 오랜 시간동안 미처 다 불사르지 못한 자료들이 한도 끝도 없이 나오는 것이었다.
가장 많이 정리해 버린 것은 책과 명함이었다. 신간소개하고는 그냥 쌓아둔 책이 얼마나 많은지, 내 뒤의 책장 두 개를 가득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여기저기 쌓여있는 것을 반 이상 정리해 버렸다. 책을 쓰고 보내주신 분들에겐 미안하지만 요즘은 너도나도 하도 책을 많이 내는 세상이라 한없이 쌓아둘 수만도 없는 것이 신문사의 고충인 것이다.
명함은 서랍을 그득 채운 1,000여장을 하나씩 보면서 40여장만 남겨놓고 다 버렸다. 언제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났는지 놀랍기도 하고, 태반은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생각이 나지 않으니 한심하기도 했다. 사회생활에서 명함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쓸데없는 만남, 형식적인 명함교환이 너무 많음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뿌린 수천장의 명함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명함을 버리면서 보니 오랫동안 잊고 있던 사람들이 기억속에서 튀어나왔다. 이 번호로 아직 연락이 될까 의심스러운 사람들, 그동안 직업이 여러번 바뀌어 명함이 여러개인 사람들, 또한 그 사이 돌아가신 분의 명함도 대여섯장 나와 숙연해기도 했다.
한국에서 온 사람의 명함은 금방 알아보기 힘든 것이, 모든 글자가 한자로 써있거나 아직도 세로쓰기를 하고 있어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했다. 목사님들 명함에는 대개 목회학 박사니, 당회장이란 말들이 쓰여있고 상당수 수많은 직함을 자랑삼아 늘어놓고 있었다.
예를 들어 몇년전 인터뷰한 가수출신 윤항기 목사의 명함을 보니 ‘대한예수교장로회 예음교회담임목사·한국기독음악신학교·합동개혁총회신학연구원·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개혁)총회장·학장 교회음악박사 윤항기 목사’라고 쓰여있다.
또 어떤 문인은 ‘국제 PEN한국본부인권위원회위원장·국제PEN한국본부이사·한국문인협회이사·한국희곡작가협회명예회장·극단POWER상임고문·경희대학교강사·작가 아무개’…이런 글자들이 모두 한자로 써있으니 얼마나 ‘골 꼬집는’ 명함들인가.
집집마다 결코 쓰지 않으면서 이사갈 때마다 끌고 다니는 박스가 있는 법이다. 거의 모든 사물이 빠져나갈 무렵 몇사람이 나를 불렀다. 편집국 한구석에서 내 이름이 쓰여진 박스가 발견된 것이다. 얼마나 오래 그 자리에 있었는지 먼지가 수북히 앉은 그 박스에는 ‘신문카피, 카탈로그, 약간의 책들’이라고 써있고 괄호안에 (안 풀를 것)이라고 명기하여 테입으로 꽁꽁 싸놓았다.
안 풀 것을 왜 싸놓았을까? 도대체 언제까지 안 풀겠다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그 오랜 세월동안 그런 것이 있는지도 모르고 살아왔으면 분명히 버려도 되겠건만 나는 또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사람들의 눈총을 받으며 밖으로 끌고 나갔다가 다시 끌고 들어왔다. 언제 시간이 나면 그 정체를 궁금해했던 사람들의 입회하에 풀러볼 생각이다.
그렇게 대난리를 치르고 출근한 월요일 아침. 편집국 전체가 깨끗하고 보기 좋다. 힘들 때는 이런거 왜 하나 투덜거리다가도 하루이틀 고생하면 새집 같이 산뜻한 기분. 이래서 카펫도 새로 깔고 페인트도 다시 하나 보다.
그런데 그렇게 버렸는데도 짐이 더 불어난 것 같으니 어찌된 노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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